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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 이동원 화가

"김광석 서정적 노랫말 한 폭의 그림 같아, 벽화 인물로 제안"

'문화는 사치'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있어 이제 문화는 필수 요소다. 대구의 문화적 명소 하면 떠오르는 곳이 방천시장의 김광석 벽화거리다. 김광석 거리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대구 출신의 이동원 화가를 만나 거리에 얽힌 사연을 들어보았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경북대 유전공학과에 3년이나 다니다가 서울대 미대에 다시 들어갔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

▶공부가 재미가 없고 해도 잘 안 되더라. 3년 동안 대학 다니면서 공부 이외에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어느 날 꿈에서 내가 화가가 된 모습을 봤다. 그래서 미대에 가겠다고 마음먹고 혼자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친의 반대가 심했지만 화가인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았는지 6개월 준비해 서울대 미대에 합격하는 행운을 얻었고 동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방천시장에 벽화거리가 만들어질 때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아는데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009년 9월 방천시장에서 '문전성시'(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 예술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는 대구 중구청의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작업실이 방천시장 근처인 수성교 건너편에 있었다. 방천시장은 내가 어릴 때 뛰어놀던 곳이었다. 그런 만큼 애정과 관심이 많았다. 어렸을 때의 활기찬 모습과는 달리 당시 방천시장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주변의 대형마트들에 밀려 슬럼화된 채 방치돼 있었다. 저렴한 임대료 덕분(?)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는데, 재생사업을 하지 않아 수년간 방치된 곳을 예술가들이 앞장서 환경개선 사업과 시장 상권을 살리는 활동을 한다니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환경개선 사업 중의 하나가 당시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고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던 시멘트 옹벽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벽화의 주제를 가수 김광석으로 하기로 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였나?

▶주제를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단 특정 인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양준혁 프로야구 선수 등도 거론되었는데, 작가 대표였던 내가 가수 김광석으로 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어냈다.

-처음부터 김광석으로 결정돼 있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사실 엄밀히 말해 김광석과 방천시장은 큰 인연이 없다. 그는 봉덕시장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봉덕시장과 방천시장이 한 블록 차이였으니 크게 보면 인연이 있다.(웃음) 김광석 노래는 서정적이다. 노랫말을 그림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할 것 같았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작가도 접근하기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김광석을 주제로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방천시장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을 하다 보면 갈등도 발생하고 그러는데….

▶처음에는 어려움도 잘 모르고 그냥 색다른 경험을 한다는 기분으로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아저씨들도 만나게 되고, 여러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선 시장 상인들과 갈등이 발생했다. 벽화거리가 방천시장과 조금 거리가 있다 보니 상권 활성화에 도움도 안 되는 곳에 아까운 세금만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작가 대표로서 시장 상인들을 붙잡고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벽화거리가 완성되고 나서도 한 1년간 그다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자 차가운 눈빛은 이어졌다. 그러나 고마운 분들도 계셨다. 작업실 옆에서 연탄도 갈아 주고 밥도 챙겨 주시던 반찬가게 아주머니, 그리고 삼천포 생선가게 할머니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참 따뜻했던 분들이었다.

-처음에 주목받지 못하던 벽화거리가 뜨게 된 계기는?

▶방송 프로그램에 몇 번 소개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또 네티즌들이 SNS에 '남들이 잘 가지 않지만 자기만 가는 장소'로 방천시장을 올렸다. 나중에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각광받게 되었다.

-낙후되고 슬럼가였던 공간이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로 변했는데 작업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뿌듯함을 느끼지 않는가?

▶물론 보람을 느낀다. 많은 사람이 와서 음악과 벽화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다만, 거기에 참여했던 작가로서 안타까운 점 또한 있다. 벽화거리가 뜨고 나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본의든 타의든 다 떠나게 됐다. 작가뿐만 아니라 대봉동과 방천시장에서 오랜 터전을 가지고 사시던 분들이 땅값과 임대료가 오르면서 상당수 떠나갔다.

-그러한 현상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낙후됐던 구도심이 번성해 돈과 사람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라 부른다. 도대체 어느 정도 임대료가 폭등했고 작가들은 얼마나 떠나갔나?

▶많이 오른 곳은 1년 사이에 10배 정도 올랐다. 사실 우리가 작업실을 구할 때 그 일대는 거의 폐허였다. 임대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집주인은 그냥 들어와 있으라고도 했다. 사람들이 드나들면 관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임대료도 10만원에서 15만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거리가 뜨게 되자 부동산 업자들이 임대료를 몇 배 올려 새 입주자를 구해 줄 테니 공간을 비워달라고 집주인을 설득했다.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3차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작가들은 1차가 끝나고 3분의 1, 2차가 끝나고 또 3분의 1이 떠나 지금은 한두 명 남아 있다.

-작가들이 계속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았다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고품격 문화거리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김광석 벽화거리는 허름해 보이지만 독특한 아날로그 감성이 있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작가들끼리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가끔 상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 구경 온 일반인도 같이 어울리는 낭만이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거의 사라졌다. 아직 벽화가 있기는 하지만 언제 없어질지 알 수 없다. 서울 이화동의 벽화도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지 않았는가. 이제 그곳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방천시장에서 '마카롱 굽는 화가'라는 과자점을 운영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는데 그림 그리는 일과는 다른 일 아닌가. 어떻게 하게 된 것인가?

▶집안 사정 때문에 잠시 방천시장을 떠나 아내가 운영하던 레스토랑 일을 도운 적이 있다. 난생처음 그림과 관련 없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다시 방천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다른 일을 해 보고 싶었다. 마침 아내 일을 도울 때 들었던 프랑스 과자 마카롱 만들기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배우면 쉬웠겠지만, 그냥 혼자 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한 6개월을 오븐과 씨름한 끝에 남들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마카롱을 만들 수 있었다. 다행히 언론에서 관심을 보여준 덕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더군다나 마카롱을 주제로 그림도 그리게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게 되었다. 새벽부터 작업실에 나와서 마카롱을 구웠는데 굽는 양만큼 그날 다 팔렸으니 돈 버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하지만 돈 버는 것보다 매일 열심히 땀 흘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렇게 잘되던 가게를 왜 그만두었는가?

▶주변 상황들을 보면서 언제부턴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구나 새로운 건물주가 월세를 4배나 올려 달라고 요구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자본에 맞서는 작가가 되리라 다짐했던 각오도 점점 약해져 갔다. 그러던 중 제주도에 내려가 생활할 기회가 생겨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했다. 당시 내 가게를 좋아해 주셨던 고객들께 죄송하다. 아직도 오늘 장사하느냐는 문의 전화가 오곤 한다.

-요즘 서울의 핫 플레이스(hot place)인 연남동에서 화실을 운영한다는데 어떤 작품 활동을 하고 있나?

▶연남동 주민들이 반려동물을 많이 키운다. 우연히 어느 날 동료 작가가 키우는 강아지를 그리게 됐는데 너무 좋아하더라. 그림을 그리는 동안, 또 그리고 나서 나 자신도 즐겁더라. 그 후 반려동물 그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반려동물도 그들의 감정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짓는데 그걸 담아내려 노력했다. 일종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 중인 셈이다. 요즘 반려동물과 생활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호응이 좋다. 마카롱 구울 때도 그랬지만, 내가 하는 일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예술가로서 보람을 느낀다.

-흔히들 예술가는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하는데, 현실의 생활인이기도 하다. 예술가로 살아가기가 어떤가?

▶솔직히 말해 힘들다. 작가, 예술가들의 경우 작품 활동만 해서 생활이 안정되는 경우는 극소수다. 나머지는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한다. 그 다른 일이 얼마나 자신의 예술세계와 연관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나 역시 가장으로서의 짐을 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20년 동안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꾸준히 해 왔다. 지금도 연남동 작업실에서 미대 진학 준비생들과 취미활동 일반인을 가르치고 있다. 다행히 반려동물 그리는 것을 배우고 싶어 하는 분들이 제법 생겨 도움이 되고 있다. 예술가는 나 홀로 경쟁력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직업이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자유가 힘들 때도 있다.

-대한민국이 경제력 등에서는 세계 주요 국가로 부상했는데 문화예술 분야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예술가로서 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원을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던데….

▶국가는 예술에 가급적 개입을 안 하는 것이 좋다. 최근의 블랙리스트 사건은 창작의 자유를 침해해 국격(國格)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예술과 예술가는 약간 분리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예술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예술가들을 위하는 길이지만, 예술가에게는 척박한 토양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섬세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토종견인 삽살개 관련 일도 한다고 들었다.

▶삽살개 재단에서 홍보 업무를 조금씩 하고 있다. 경북대 유전공학과 재학 시절 은사님이 삽살개 재단의 이사장이시다. 재단의 문화적 측면을 거들어 왔는데, 경기도 지역에 삽살개를 비롯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바둑이 등 토종견이 많다고 해서 일을 확대시키려 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반려동물 작품 활동과 잘 어우러질 수 있어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할 생각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화가는 괜한 넋두리만 늘어놓은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 맑은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날을 기대해 본다.

※매일신문'TBC 공동기획 '신지호가 만난 사람'은 6월 10일 오전 9시 30분 TBC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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