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녁과 화살
그동안 여러 날이 흘렀다. 우리의 용마기지를 취약 지구라는 상황 때문에 월남 정규군에게 기지 전체를 인계하고 사단 사령부 근처로 부대 이동을 한 후 기지 전체가 너무 협소해서 확장 공사를 병행해서 두 번째 베트콩 토벌작전인 '박쥐 27호 작전'도 또 한 차례 뛰었다. 그리고 귀대한 뒤 피로도 채 풀리기 전에 갑자기 주월 사령관의 명령으로 '분대 전술시범' 명령이 떨어졌다. 각 사단과 연대 또 대대별로 세분해서 일개 중대씩 차출을 해서 주월 사령관 앞에서 전술시범을 보여야 하는데, 우리 대대에서는 하필이면 우리가 시범 중대로 지정됐다는 전갈이 왔다.
높은 분들이 방문하는지라 기지 주변 정리 정돈하랴, 힘겨운 교육 받으랴 시간이 흐를수록 부대 생활은 새롭게 고달파지기 시작했다. 피로가 겹쳐만 갔다. 그야말로 깡다구만 남아 물에 적셔지듯 땀에 흠뻑 젖었고 뜨거운 불볕은 땀방울을 증발시켜 온몸을 소금 분말을 뿌옇게 뒤집어쓴 모습으로 만들어 갔다. 오로지 푸른 기운의 눈빛만 살아있는 모습들이었다.
분대전술. 분대장 한 사람이 이끄는 1개 분대원 9명이 인솔자의 완수신호로 민첩하게 날아가듯 움직여서 그 어떤 상태에서도 전면전에서 적을 누르고 꺾을 수 있는 전투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마지막 육탄전에 이르게 되면 태권도와 대검으로 적을 제압하는 팔팔한 생동력을 본능처럼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대종대, 분대횡대, 행군종대, 분대능대, 그리고 부분대장 좌'우행대 등으로 바꾸어 나가는 민첩한 행동은 물론이고, 마지막으로 목표점을 설정하고 분대의 일괄적인 파상공격 형태를 유지해야 했다. 장애물을 최대한 응용하라, 피아노 건반식 전진이다, 또 질서 있고 박력과 실감 있는 동작이어야 한다는 등 중대장은 매일같이 들볶아대고 있었다. 나중에는 연대장, 부연대장, 대대장 등 높은 분들이 아예 우리 중대에 들러붙어 살다시피 해, 더욱 긴박해지는 분위기는 폭염과 더불어 피부를 까맣게 태우고 장아찌같이 졸여버리는 것만 같았다. 개별 전진을 하다 땅 위를 포복하는 자세를 취하면 태양열을 받아 후끈하게 되쏘는 지열로 숨이 턱턱 막힌다. 전진과 포복 은폐를 정밀한 계산과 측정을 한 시간에 맞추어 앞뒤를 가늠해야 하므로, 개인적인 동작은 추호도 용서되지 않았다. 측정관의 위치에서 볼 때 가열판 위에 오른 콩알처럼 정확히 주어진 시간에 힘차게 순서대로 튀어 올라야 하는 것이다. 거듭되는 중복 훈련과 수정되는 교범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이웃 맹호부대에서는 느닷없이 인사계인 상사를 분대장으로 하고 비교육병인 취사병들이나 행정요원들을 전투 분대원으로 급조 편성해서 시범을 명령받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미숙하고 기대에 못 미칠 것은 당연했을 것. 하지만 사령관의 노여움은 대단했고, 그에 대한 문책으로 상사가 중사로 계급 강등되고 하사가 일반 사병으로 떨어져 내리는 등 주월 사령관의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벌칙을 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는 어느 한 사람 제외자도 없이 총동원되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 검은 얼굴의 중대장은 매일같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악을 쓰다 보니 아예 얼굴은 새까만 토인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연대 수색중대가 작전 중 생포해 온 베트콩 한 명이 심문 도중에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숨기고 있던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고 한다. 그를 왜 하필이면 우리 중대로 데리고 왔을까. 나는 소대 전투훈련을 하다가 사역병으로 차출되어 갑자기 작업도구를 들고 가 이 주검을 묻어주게 되었다.
지프 뒤 트레일러의 포장 밑에서 시신을 담는 방수 장치가 된 특이한 형태의 기다란 시신 운구 백을 내리고 옆구리를 가르듯 지퍼를 열어 시신을 옮겼다. 팬티만 입은 채 발가벗겨져 시퍼렇게 변색되어 가는 시신은 무척이나 약하고 왜소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생명이 팔팔하고 피가 뛰던 몸에 죽음이 내리고 영혼이 떠나갔다는 이유 하나로 산 사람과 전혀 다른 세포인 것 같은 피부와 살갗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언가 모를 어색함과 함께 묘한 거리낌으로 자꾸만 시체를 만지는 손길이 멈칫거려졌다. 행여 주변 월남인의 눈에 띌세라 후미진 계곡의 불발탄 처리장 자갈밭을 헤치고 그 시신을 묻었다. 구덩이를 헤집고 집어넣었지만 굳어진 자세가 바르지 않아, 그 시신을 바로잡느라 머리와 발을 들어 바로 하고 머리를 놓았는데 땅에 닿는 순간 머리통이 힘없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가뜩이나 스산한 마음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고르지 못한 자갈과 잡석이 섞인 주위 흙을 긁어모아 구덩이를 메우고 표 나지 않게 평지로 만들었다.
하나의 젊은 생명이 주위 가족 아무도 모르게 육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생명을 받고 태어나 어린 시절을 거쳐 소년, 그리고 청년이 되었을 것이다. 이십수 년의 세월 속에 젊은 넋이 오늘 이렇게 땅에 묻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남겼을까. 기쁘고 보람된 순간도 많았을 테고, 사랑하는 부모형제나 정겨운 연인도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로서의 푸른 꿈은 어쩌고 스스로 독을 마셔야 했을까.
죽음이라는 것이 전쟁터에서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처리될 수 있고, 또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스스로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죽음 그 자체는 두려운 것이고 그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기에 죽음을 무섭게 느꼈을 것이다. 하물며 자기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또 자신의 사상과 조국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야 했던 열사의 의지가 아닌가. 비록 우리 서로 다른 기준이 있다 해도 그로서는 그 나름대로 참다웠을 그 뜻과 사상을 높게 받들어 애도를 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죽음 앞에서 적과 우군으로 나누어진 우리 모두 똑같은 입장이라는 것은 자명한 현실이고 피할 수 없는 사실 아닌가.
저가 나일 수 있고 나 또한 저일 수도 있다는 느낌 앞에서 나 스스로의 목숨을 내 조국과 동료의 안전을 위해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자신이 없다. 저 주검에서 또 한편 우리의 주검을 본 것 같은 아픈 마음이 든다. 전투지에서는 금기시되는 여린 감상인 줄 알지만, 왜 우리가 여기 이역 땅 멀리 외진 곳에 와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전쟁과 전투를 치러야 하는 것일까.
세상을 나누는 두 줄기 커다란 양대 사상의 갈림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흐르는 역사 속에서 제단 위의 속죄양처럼 사라져간 오늘의 이 젊은 죽음을 그 한쪽의 사상은 어떻게 평가해줄 것인가.
'너 피우지 못한 젊음아, 오늘의 운명은 어쩔 수 없으나 부디 고이 잠들어 다음 세상에서는 사상의 갈림이 없고 전투나 전쟁이 없는 곳에 태어나서 영원토록 복된 삶을 누리거라. 오늘 마저 하지 못한 충만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맘껏 영위할 수 있어라. 그래서 네가 택한 죽음이 다음 세상에서 아름다운 보상으로 더 밝고 복된 삶이 될 수 있어라.'
비록 적이지만 아직 푸르른 젊음을 미처 피우지도 못하고 이승을 달리한 그의 넋 앞에 조용히 홀로 두 손을 모았다.
※매일시니어문학상은
전국 신문사 최초로 매일신문이 제정해 운영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문학상 공모전입니다. 만 65세 이상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공모 부문은 논픽션, 시, 수필 등 3개 부문입니다. 대상 1명 500만원, 최우수상 3명 각 300만원, 우수상 15명 각 100만원 등 총상금 4천100만원입니다. 주제에는 제한이 없으며, 매년 5월경 공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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