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할 나이인 63세에 창업에 나서 성공한 기업가' '현대자동차 판매왕' '부산지구(355-A지구) 총재로서 국제라이온스협회 세계최고지구상을 수상한 봉사자' '교육선진화재단 총재'….
박유근(69) 부광정밀공업㈜ 대표를 이야기하는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집사'이다. 정주영 회장의 집사들이 대부분 현대건설 출신이었던 만큼, 박 대표는 현대자동차 출신의 유일한 집사였다. 그리고 정 회장과 귓속말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심복이었다.
생전에 정 회장을 마지막 만난 것은 2000년 4월 17일 경주에서였다. 호출을 받고 부부가 함께 달려갔다.
(정주영 회장) "너, 여기 왜 왔노? 일은 안 하고. 어서 가서 일해라"
(박유근 대표) "회장님이 불러서 왔는데요?"
(정주영 회장) "쓸데없는 소리"
한참 후, 다시 불러 들어갔다.
(정주영 회장이 용돈을 건네며) "왜 이제 왔노? 내가 너한테 용돈을 10번은 더 주고 죽어야 할 텐데…."
그리고 나흘 뒤 부고가 날아들었다. 현대차 부산영업본부장(상무)으로 근무하던 박 대표는 급히 차를 달려 3시간 50분 만에 서울아산병원에 도착했다. 가족들보다 더 빨랐다.
◆가난했지만 낙천적인 어린 시절
박 대표는 1949년 달성 옥포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대구로 나가 사는 바람에 동네에서도 소외되는 처지였다.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화원 달성중학교까지 40㎞를 매일 걸어서 다녔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실망하거나 낙담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어쩌다 친구 집에서 먹을 것이 생기면 동생들 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밥 먹고 잘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낙천적인 성격은 타고났다. 동생들이 공부를 못해도, 싸우고 와도 그럴 수 있다며 두둔했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저놈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지, 돌부처가 들어앉아 있네!"라며 동생들을 야단치다가도 웃어 버리셨다.
넷째 동생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재산목록 1호인 소를 끌고 가출해 버렸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지 못했고, 죽었다는 점쟁이 말에 제사를 지냈다. (훗날 권투 동양미들급챔피언전 TV 중계를 보다 도전자 이름이 동생하고 같아 혹시나 하고 연습장을 찾아갔다가 생이별한 동생을 다시 만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학교성적이 뛰어났던 박 대표는 대구공고를 거쳐, 한양대 기계공학과(야간)로 진학했다.
◆"이게 민주주의냐?" 유신 반대와 강제 전역
집안형편 탓에 도저히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1학년을 마치고, 단기하사로 공군에 입대했다. 군복무 중 유신헌법 찬반 투표가 있었다. 군에서는 '찬성' 공개투표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고, 박 대표는 비밀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행정장교와 옥신각신하다 그만 투표용지가 찢어져 버렸다. 이게 빌미가 되어 투표 거부 선동, 상관 명령 불복종 등 7가지 죄목으로 보안부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군검찰은 사형을 구형했다.)
(군검찰) "명령을 불복종한 것은 인정하지요?"
(박 대표) "명령을 불복종한 것이 아니라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거부했을 뿐입니다. 무조건 찬성표를 찍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군검찰) "불법선동을 한 사실은 있지요?"
(박 대표) "불법선동을 한 사실은 없고, 내무반 동료들에게 민주국가에서 이런 일이 있어서 되겠느냐고 말한 사실은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조목조목 반론을 제시하면서, 결국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강제 전역을 당하게 되었다.
강제 전역도 순탄치 않았다. 전역사유가 '무능력자'로 기재되어 있어, 이에 반발한 박 대표가 전역을 거부하며 계속 군에 복귀했기 때문이다. 헌병이 끌어내면, 몰래 개구멍으로 내무반에 복귀하기를 2개월간 반복했다. 결국 군에서 두 손을 들고 전역사유를 '의가사'(문인)로 바꿔주었다. 군복무 중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것에 착안, '문인으로서의 자질을 키울 수 있게 하기 위해 전역시킨다'고 한 셈이다.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
복학 후에도 유신반대 데모를 하다가 제적을 당했다. 그래도 꿋꿋이 동기들과 함께 수업을 받았다. (비록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동창회 활동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히 한양대 동문으로 대접받고 있다. 최근 한양대에서 3학년 편입을 제안했고, 박 대표도 조만간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다.)
동기들이 졸업할 때 박 대표도 현대자동차에 지원했다. 학력란에 '한양대'는 크게 쓰고, 그 뒤에 조그맣게 '중퇴'라고 적었다. 어쨌든 별문제 없이 합격했다. 입사성적도 상당히 우수했다.
정 회장과의 인연은 '사보 기고글'에서 시작됐다. 과장대리 시절 부산에서 일하면서, 호남향우회장을 3년간 쫓아다닌 끝에 차 1대를 판 것이 계기가 되어 호남향우회를 장악하고 '판매왕'에 올랐다. 덕분에 사보에 기고글을 청탁받았다. 그 글이 회장 인사말 뒤쪽에 실리는 바람에 정 회장이 읽어보게 되었다.
"글의 내용은 '인생역전'이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 현대차에 근무하니 아주 좋다는 식이었죠. 물론 강제 전역이나 데모 이야기는 쏙 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장님이 기고를 읽고 '나하고 비슷한 놈이 있구나' 하며 이름을 메모해 두었다고 합니다."
본격적인 인연은 1982년 정 회장이 주도한 문맹퇴치 운동인 한국사회사업학교로 맺어졌고, 이후 정 회장의 특명을 받아 현대건설의 주요 토지 매입 관련 뒷조사와 직접 토지 구매를 한 것을 비롯해 각종 '비밀스러운' 업무를 수행했다. 청운동 정 회장 자택에서 자주 먹고 자기도 했다. 정 회장이 남북교류사업을 추진할 때는 최측근으로 방북에 동행했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총선'대선을 치를 땐 핵심참모로 활약했다.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통합21'을 만들고 대선에 나설 때에도 영남지역 특별보좌관을 맡았다.
◆은퇴 대신 창업에 나서다?
정 회장이 돌아가신 지 3년여 만인 2003년 6월 현대자동차 부산본부장(상무)을 마지막으로 퇴사했다. 정몽준 회장이 현대중공업 입사를 권유했지만 거절했다. 그 대신 본인 소유 주유소에서 세차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 2006년 어려운 상황에 처한 대구지역 자동차부품회사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와 대표이사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3년 만에 '토사구팽' 당했다.
현대차 후배들의 요구는 거셌다. 자동차부품회사 대표 시절 "해보겠다"고 한 캘리퍼 바디(자동차 디스크 브레이크의 핵심부품) 생산을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선배님 때문에 우리가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을 쳤다. 어쩔 수 없이 사재를 털어 회사를 세웠다. 환갑이 훨씬 지난 나이였다.
"캘리퍼 바디 생산은 7개 공장에서 시도하다 포기한 사업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에 도전했다 망한 기업이 30여 개나 됐습니다. 2010년 한 해에만 27억원의 적자가 났습니다. 기가 막히고 아찔했죠. '사즉필생'의 각오로 추가 투자와 연구개발에 나섰습니다. 불량의 원인과 해법을 찾기 위해 생산라인을 밤새워 지켰습니다. 현대차에는 기본적으로 나는 불량을 너희가 책임지라고 요구했습니다."
온갖 고생을 한 후 부광정밀공업은 2014년 첫 흑자를 기록했고 지난해에는 6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양산 차량 17개를 포함해 80여 개 차종에 들어가는 캘리퍼 바디를, 연간 400만 개 생산하는 세계 최대의 공장으로 성장한 것이다.
박 대표는 또 발명왕이기도 하다. 전기료를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는 '실외기 없는 에어컨'과 '빔프로젝터+전자칠판+화상회의+TV'의 융복합 기능을 가지면서 스마트폰과 아이패드에 연동되는 신제품,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발암물질로 기름의 손실을 일으키는 유증기를 막는 '주유소 유증액화기' 등을 개발 완료했고, 전기자동차용 브레이크도 개발하고 있다. 박 대표는 신제품의 사업화를 내년부터 본격화하기 위해 한 달 전 30억원을 투자, ㈜BK일렉트론을 설립했다.
◆세상을 바꾸자!
박 대표는 사업만큼이나 세상 일에 관심이 많고, 열정이 넘친다. 솔직히 늘그막에 사업한다고 생고생 안 해도 충분히 노년을 풍족하게 보낼 재력을 갖췄다. 이 때문에 사업보다 더 큰 걱정은 '한국사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다.
박 대표의 입에서는 세상을 바꿀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 대선에 출마하려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관련 서류를 받아 왔습니다. 물론 제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죠. 하지만 대선에 출마할 경우 돈은 좀 들겠지만 전국을 돌며 우리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속 시원하게 국민들에게 알릴 기회는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위에서 극구 만류해 마지막 단계에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래도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 찾아 할 것입니다."
박 대표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인구 절벽'을 지적했다. 아이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교육과 각종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에 목매지 않아도 학벌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세상, 현장 노동자들이 더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삼성, 현대차, 포스코 등 대기업의 대주주는 국민연금입니다. 왜, 국민의 재산을 가지고 소수 재벌이 마치 자기 것인 양 정경유착을 통해 사익을 추구합니까. 지금처럼 서민과 중소기업이 망하는 빈익빈 부익부가 계속되면 대기업이 만든 제품을 살 국민이 없어지고 대기업에 납품할 중소기업도 다 없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대기업도 망하게 됩니다."
박 대표는 인터뷰 내내 회사 걱정보다 나라 걱정이 앞선다고 현실을 답답해했다.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