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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 산책] '정'과 '동' 충돌이 빚어낸 난데없는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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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백로도병풍.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회백로도병풍.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가다가 비가 그쳐[道中乍晴(도중사청)] 朴趾源(박지원)

백로 한 마리는 버들 뿌리 밟고 섰고 一鷺踏柳根(일로답유근)

백로 또 한 마리는 물 가운데 곱게 섰고… 一鷺立水中(일로입수중)

산 중턱 짙푸르고 하늘빛 먹물인데 山腹深靑天黑色(산복심청천흑색)

무수한 백로 떼들 허공에서 퍼덕이네 無數白鷺飛飜空(무수백로비번공)

개구쟁이 소를 탄 채 시냇물로 첨벙첨벙 頑童騎牛亂溪水(완동기우난계수)

시내 건너 각시 무지개 하늘 높이 떠 있어라 隔溪飛上美人虹(격계비상미인홍)

보다시피 작품의 앞부분은 '동작 그만'의 너무나도 정적인 모습이다. 우선 1구와 2구는 하나하나가 액자 속에 들어 있는 작은 그림이다. 앞의 그림이 백로 한 마리가 버드나무 뿌리를 밟고 서서 아주 멍청하게 먼 산을 바라보는 풍경화라면, 뒤의 그림은 백로 한 마리가 수면을 경계로 하여 황홀하게 그린 데칼코마니다. 시선을 들면 비 젖은 산 중턱은 짙푸르고 하늘은 온통 캄캄하다. 그런데 바로 그 시퍼런 산과 캄캄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강렬한 보색의 무수한 백로 떼가 갑자기 푸드드드 드드덕 날아오른다. 지극히 정적이던 풍경이 완전 동적으로 뒤바뀌면서 화면 전체가 아연 살아서 퍼덕거린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품의 앞부분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자는 1, 2구에서 마치 백로가 두 마리밖에 없는 것처럼 표현했다. 하지만 만약 백로가 두 마리밖에 없었다면 뜬금없이 나타난 무수한 백로 떼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보이는가? 제2구 뒤의 여백 속에 무수한 백로 떼들이 제각각의 포즈로 서 있는 모습이. 그런데 그 백로 떼들은 왜 갑자기 허공을 향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나? 개구쟁이 아이가 소를 타고 돌발적으로 개울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개구쟁이는 왜 느닷없이 소를 탄 채 개울물로 뛰어들었나? 개울 건너편에 황홀한 각시 무지개가 하늘로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우와! 무지개다. 저 무지개 봐라!"

이쯤에서 작품을 시간 순서대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내리던 비 그치자 산은 짙푸르고 하늘은 아직도 캄캄하다. 그와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무수한 백로 떼들이 제 나름의 자세를 취하며 아주 고요하게 앉아 있다. 그때 개울 건너편에 각시 무지개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소 탄 개구쟁이가 그 황홀한 무지개에 홀려 개울물로 풍덩풍덩 뛰어든다. 깜짝 놀란 백로 떼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저 무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시간의 순서대로 사건을 전개하는 천편일률에서 벗어남으로써 '~하니 ~하고' '~하여 ~하다'는 식의 상투적 현토(懸吐)를 거부하는 작품이다. 게다가 지극히 정적인 상황과 지극히 동적인 상황이 극명하게 충돌을 일으키고, 아주 뜻밖의 상황이 돌발적으로 전개되어 정말 난데없는 충격을 준다. 자갈밭에 떨어진 럭비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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