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문의 한시 산책] 막걸리에 국화꽃을!

막걸리에 국화꽃을! 김신윤

돌연 서울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輦下干戈起(연하간과기)

시체가 여기저기 마구 나뒹구네 殺人如亂麻(살인여란마)

중구(重九) 좋은 때를 그냥 보낼 수는 없어 良辰不可負(양신불가부)

띄워서 마신다네, 막걸리에 국화꽃을! 白酒泛黃花(백주범황화)

* 원제: 庚寅重九(경인중구)

고려전기의 우국 시인 김신윤(金莘尹, ?~?)이 경인년 중구(重九'重陽節)에 지은 시다. 여기서 말하는 경인년은 1170년,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해다. 중구는 음력 9월 9일, 가족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국화주를 마시며 가을 정취를 즐기던 날이다. 지금은 추석이 가을 명절의 대명사로 완전히 정착되었지만, 추석보다도 중구가 오히려 더 큰 명절일 때도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에 곡식이 익지 않으면 중구에 차례를 모시기도 했다.

고려전기 문신귀족사회가 몰락하기 직전인 의종(毅宗) 시대의 정치 현실은 도도하게 흐르는 탁류였다. 나라는 구조적인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고, 민중들은 수렁에 빠진 채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정말 타락한 사회였고, 이런 사회 속에서 도덕적인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수구 속에서 금붕어가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시커멓게 흘러가는 하수구 속에서 금붕어처럼 살려고 온몸으로 발버둥친 시인이 있었다. 당시의 어지러운 현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퍼부었던 이 시의 작자가 바로 그다.

같은 시대의 시인 임춘(林椿)의 표현에 의하면, 김신윤은 "봉황새 같고 기린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나라를 구할 수만 있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의종에게 바른말을 퍼부어댔다. 하지만 의종은 그의 입을 틀어막았고, 급기야는 멀리 내쫓아 말할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터질 것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문인들은 닥치는 대로 다 죽여버리라"는 아주 단순한 구호를 외치며 칼을 들고 일어난 정중부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김신윤은 피비린내나는 무신들의 쿠데타 현장을 무기력하고 참담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임춘의 표현대로 "어지러운 세상을 만난 것 자체가 영웅 김신윤의 불행"이라 할까.

1170년 8월, 사건의 현장인 서울에는 문신들의 시신이 난마처럼 뒤얽혀 나뒹굴고 있었다. 난장판 같은 세상 속에서도 무심한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9월 9일 중구가 다가왔다. 이 뜻 깊은 명절에 김신윤은 국화꽃을 띄운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하지만 그가 띄워 마신 것이 어찌 국화꽃뿐이겠는가. 아마도 천 가지 울분과 만 가지 감회를 함께 띄워 마시며, 울면서 이 시를 지었으리라. 이런 시를 짓는 불행한 시인이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말기를, 실로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을 언어와 언어 사이 여백에다 담아서.

어? 그러고 보니 오늘이 바로 음력 9월 9일, 거의 천 년 전 시커멓게 흐르는 하수구 속에서 살던 금붕어가 막걸리에다 국화꽃을 띄워 울면서 마시던 바로 그 날이네.

시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