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가톨릭에서는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지들은 물론 죽은 모든 이의 영혼을 위하여 특별히 더 기도하는 위령 성월입니다.
위령 성월에 접어들면 성모당에 있는 성직자 묘지를 찾게 됩니다. 다른 일로 왔다가도 위령 성월에는 바쁘지 않으면 묘지에 잠시 들르게 됩니다. 돌아가셔서 묻혀 계신 분들을 떠올리고 생각하며 기도하게 되지요.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이 머물게 됩니다.
언젠가 밤늦은 시간에 위독한 할아버지의 병자성사를 청하는 아들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서둘러 병자성사 가방을 챙기고 밤길을 가서 병원에 도착하니, 할아버지는 손때 묻은 새까만 십자가를 손에 쥐고 계셨습니다. 신부님이 왔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지요. 그리고 제 손을 잡으시곤 숨을 몰아쉬면서 연신 "신부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 손에 쥐어 있는 그 십자가는 어릴 때 성당에서 받은 십자가인데 고향 떠날 때 가지고 온 거라고, 그런데 고향을 떠나와서는 60년 넘게 신앙생활 하지 않고 냉담했다고, 성당에 가야지 하면서도 먹고살기 바빠서, 자식들 키우기 바빠서 성당에 못 갔다고, 아니 사실 그건 핑계라고, 성당에 가야지 하는 마음이 간혹 들기도 했었지만 잊고 살았다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살면서 성당에 안 다닌 것이 너무 후회스럽다고, 하느님께도 죄송하고, 처음 보는 신부님께도 죄송하다고, 그래도 죽기 전에 신부님을 만나 꼭 성사를 받고 싶었다고, 고맙다고 하셨지요. "더 일찍 하느님을 찾았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씀 속에서 후회와 아쉬움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사를 받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셨지요. 할아버지께서는 그 밤에 병자성사의 위로 속에서 십자가를 손에 쥐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숙고해야 할 주제입니다. 앞서 말한 성직자 묘지의 입구에는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라틴어 글귀가 씌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는 죽음. 나와는 상관없는 듯이 죽음을 잊고 살아가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죽음이 사실 나에게 바로 내일일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지만, 죽음에 대한 묵상은 지금의 나의 생활을 돌아보고 추스르게 해줍니다. 나는 지금 과연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지, 그것이 나에게 진정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혹시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할아버지처럼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죽음에 대한 묵상은 일탈된 우리들의 생활을 바로잡아주고 겸손을 일깨워 주는 도구입니다. 죽음 앞에서 더 이상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시기, 질투, 미움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집착했던 많은 것들이 죽음 앞에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의미를 잃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에 욕심내느라 하찮게 여기고 버려두었던 소중한 가치들이 드러납니다. 가족, 사람, 사랑, 믿음, 평화, 존중, 배려, 함께함, 십자가, 복음, 하느님….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을 눈감고 놓치지 말고 정말 깨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11월, 위령 성월입니다. 그리운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기억하고 기도해 줄 이 없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죽음을 생각하고, 더 늦기 전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좀 더 깨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