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의 신 후직(后稷)이라도 한겨울에 농사를 짓는다면 흉년을 면할 길이 없고, 풍년이 들면 노비에게 맡겨도 수확을 얻을 수 있다.' 한비자(韓非子) 유로편(喩老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기운(勢)이 형성되면 평범한 사람이라도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전체 분위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리더 한 사람의 특별한 역량보다 전체적인 기운, 즉 평범한 사람의 역량 총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를 '헬 조선'이라고들 한다. 그 예로 'OECD 세계 최고 자살률' '노인 빈곤율 세계 1위' 등을 든다. 정말 한국은 '헬 조선'일까?
통계로 보면 자살자의 약 80%는 우울증 환자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항우울증 처방 비율은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다.(2013년 기준, 28개 조사국 중 끝에서 두 번째) 적절한 처방을 받으면 죽음을 택하지 않을 사람들이 치료를 외면하기에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살률'이라는 수치를 구성하는 데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지만, 우리 사회를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살의 원인이 경제적 빈곤에 있다고 규정해버린다.
'개천에서 용(龍) 안 나는 사회'라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용이 나자면 물이 깊어야 한다. 한국의 현대사는 개천을 넓혀 강과 호수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안 나는 것은 '강과 호수가 늘어나면서 개천이 줄었기 때문'이다. 개천에서는 용이 덜 나지만, 넓은 강과 깊은 호수에서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용이 나오는 것이 오늘의 한국이다. '개천에서 나오는 용 숫자'만 보고 우리 사회가 합심해 길러낸 더 많은 용을 무(無)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개천 수준에 머무는 가정'은 많다. 개천밖에 가진 것이 없는 부모라면 남들보다 더 알뜰하게 자식을 보살펴야 한다. 개천에서 용 안 나온다고 원망할 게 아니라, 자식들에게 강과 호수를 구경이라도 시켜주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OECD는 우리나라 66~75세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이 42.7%, 76세 이상은 60.2%로 노인 빈곤율 세계 1위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수치는 수입(收入) 빈곤율일 뿐이다. 우리나라 국가연금제도는 1988년에 시작돼 1950년대 출생자 상당수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 또한 OECD 통계는 한국의 효 문화, 즉 노인 절반 이상이 자식으로부터 일정한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평범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산목록 1호로 생각하는 주택 역시 '노인 수입'에 포함하지 않는다. OECD 발표 수치는 우리 사회의 정확한 모습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에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양극화, 저출산, 청년실업, 노후 불안, 원 트랙(one track) 일변도의 학업 경쟁 등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난관은 수두룩하다. 그 많은 문제에 눈 감고 귀 막자는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잘해 왔고, 앞으로도 더 나은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고래로 우리는 국민 개인이 스스로 돕기보다는 훌륭한 지도자가 이끌고, 대중은 따르는 방식에 익숙했다.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도자만 바라보고, 지도자에게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21세기 대한민국은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다단하다.
개인이 각자의 영역에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스스로 주인이 될 때 대한민국은 순풍을 탈 수 있다. 비록 어렵더라도 오늘을 긍정하고, 선의를 갖고 서로 협력하면 우리는 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다. 아름다운 여인 테스(영국 소설가 토마스 하디 작 '테스'의 주인공)를 그토록 불행한 운명으로 이끈 것은 자신의 미래를 '썩은 사과'에 비유했던 그녀의 성격이었다. 한국을 '헬 조선'으로 규정한다면 '헬 조선'과 만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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