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가슴이 떨리는 무사시노의 중고가게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일어일문학 문학박사. 국경없는 교육가회 기획홍보특보. 수필가
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일어일문학 문학박사. 국경없는 교육가회 기획홍보특보. 수필가

먼지 뽀얗게 덮인 아리타 도자기 등

간혹 엄청난 고가품도 건질 수 있어

특별히 비싼 가격표 단 물건 눈길

"마누라가 팔고 싶지 않아서"라 설명

큰일이다!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데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 "어느새 가슴이 아니라 다리가 떨리는 나이가 되었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시 우울해졌다. 하기야 우리나라에 없는 것 없이 좋은 물건들이 차고 넘치니 다리는 물론이고 지갑을 든 손도, 가슴도 떨리지 않는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오~ 샹젤리제"를 소리 내어 불러본다.

드디어 찾았다. 가슴이 떨리고 지갑을 든 손이 떨린다. 토요일 아침 파리 남쪽 방브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어디서부터 훑어야 할지 마음이 급해졌다. 이후 나의 여행은 벼룩시장을 찾는 것으로 재미를 더했다.

여행만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벼룩시장, 중고가게를 찾아다닌다. 지역마다 중고재활용센터가 있다. 우리 동네 구청 마당에서는 매주말 물물교환의 장이 열리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 집 소파도 테이블도 여기서 구했다.

딸아이가 도쿄 소재의 미술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교 앞에 원룸을 얻고 이 방을 채울 물건들을 사러 가야 하는데, 부동산 주인을 통해서 중고가게를 소개받았다. 딱히 버스노선도 없어서 1시간 이상을 걸었다. 찾다가 찾다가 그냥 백화점에나 갈 것을, 아끼면 얼마나 아낀다고 이런 고생을 하는지 후회하기도 했다. 조용한 주택가에 덩그러니 사각형 단층 건물이 하나, 골목골목 구석진 곳에 있었다.

냉장고, 세탁기, 책상, 그리고 쓰레기통까지 대학가 선배들이 쓰고 간 물건들을 하나하나 주워담았다. 중고 중에서는 가장 좋은 2년 사용한 물건을 선택하는 사치를 부렸다. 대학가다 보니 2년 혹은 4년, 6년 사용한 물건들 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올릴 연필꽂이까지 고르니 10만엔 정도다.

다음이 재밌다. 가게 안쪽에서 쿰쿰한 냄새가 풍겼다. 4년, 6년 전의 것이 아니라 40년 60년 전의 고물들이 규칙도 없이 쌓여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덮인 나무상자를 풀어보니 아리타 도자기가 있고, 주전자에 찻잔도 있다. 매화꽃이 조각된 벼루도 있다. 이건 작품이다. 이런 건 어디서 가져온 물건이냐고 물었더니, 주인 왈 "이 지역의 노인분이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내놓고 간 물건"이란다. 오랫동안 간직한 물건들을 한꺼번에 정리해주기를 바란다면서 내놓으니 버려야 하는 쓰레기 비용도 만만찮지만 간혹 엄청난 고가품도 건진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모퉁이가 살짝 깨지기는 했지만 옻칠이 되어 있는 상자를 여니, 오르골 소리가 난다. 어느 집 귀한 따님이 간직했던 보석상자가 분명하다. 시집갈 때 들고 간 것일까.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상자가 "나 살아있다"고 소리를 내면서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담고 나에게 다가왔다. 3천엔이면 이 집 물건치고는 상당히 비싼 것이다.

쭈그리고 앉아서 하나하나 뒤지다 보니 별 물건들이 많다. 지난해 프라하를 여행하면서 본 보헤미안 유리의 와인 잔이 여기에 있다. 지금의 여행객들에게 선보이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의 사회주의 나라일 때, 물건의 가치를 돈으로만 대비시키지 않는 그 옛날 장인의 손으로 만든 잔이다. 해외여행이라고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가능했던 시절 부잣집 안주인이 사온 것일까, 선물 받은 것일까.

특별히 좋아 보이지 않는 물건 중 유독 비싼 가격표를 달고 있는 것이 있어서, 내가 모르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했더니 "우리 마누라가 팔고 싶지 않아서 이런 가격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웃지 않을 수 없는 가게다. 오래된 물건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동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다리다 지친 딸아이는 만지기만 해도 먼지가 나는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도쿄의 서쪽 대학가 무사시노(武蔵野)는 에도시대 초기에 계획적 신전개발에 의해 도시화되었다. 제2차 대전 때에는 군수 공장이 있었으며 전후에는 주거 도시로 급속히 발전했다. 나에게 무사시노는, 1898년 구니키다 도포(国木田独歩)의 산문 '무사시노'로 기억된다. 무사시노의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보고 느낀 아름다운 풍경과 정취를 묘사한 글이기 때문일까. 교외의 숲과 논밭으로 이어지는 거리에서 사람들의 숨소리를 느낀다. 나는 오늘 골목의 작은 중고가게에서 무사시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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