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정치권력 경제권력

영미권에는 '노 페니, 노 파든'(No penny no pardon)이란 표현이 있다. '돈이 없으면 관용도 없다'는 뜻인데, 사법의 준엄한 칼날이 돈 앞에서 무뎌지는 것은 동서고금의 공통 현상인가 보다. 우리말 중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신랄한 표현이 있다. 저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명제가 참인지는 통계로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혹자는 권력이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간파했다. '권력은 처벌받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정의가 옳다면, 지금은 돈이 곧 권력인 세상이다. 경제사범이 일반사범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양형을 받는 일이 하도 허다해서 그렇다.

특히 재벌가 재판과 관련해 우리나라에서는 '3'5법칙'이라는 요상한 경험칙이 발견된다. 재벌 총수들이 재판에 회부되면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난다는 속설이다. 낭설이 아니라 '팩트'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10대 그룹 총수 중에 절반은 이런저런 비리와 범죄에 연루돼 재판에 회부됐으나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다. 경제사범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재벌 총수 일가가 하나같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이때 구구절절 등장하는 것이 정상 참작이다. 지금까지 경제에 기여한 공이 크기에 풀어주고, 어려운 경제를 살리라며 풀어준다. 재벌 일가로서는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집행유예만 받으면 회사 경영권을 행사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따가운 여론이야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5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뇌물 공여 항소심에서 그가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것을 놓고 갑론을박이 뜨겁다. 사법부 판단은 마땅히 존중돼야 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십억원의 뇌물을 공여한 그에게 집행유예 양형이 내려진 것을 많은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 역시 현실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겁박을 당한 피해자라고 보았다. 이 프레임대로라면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앞으로의 재판 전망이 더 어두워졌다. 항간에서는 사법부가 '죽은 정치권력'을 버리고 '살아 있는 경제권력'을 택했다는 말마저 나돈다. '세기의 재판'이라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대한민국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진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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