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의도적 망각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1855∼1909)는 16년에 걸쳐 인간의 기억 지속에 대한 실험을 했다. 이를 통해 에빙하우스는 인간은 기억한 것의 절반을 대략 1시간 내에 잊어버리고, 하루가 지나면 70%, 한 달이 지나면 80% 정도를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20%나 기억하니 대단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한 것 대부분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인간은 망각하는가? 이에 대한 과학의 설명은 '부식 모델'(decay model)과 '간섭 모델'(interference model) 두 가지다. 전자는 옷이나 신발이 오래되면 닳고 헤지듯이 기억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닳아 없어진다는 것이고, 후자는 뇌의 기억용량 한계 때문에 여러 기억이 자리다툼 끝에 일부가 밀려나 없어진다는 설명이다. 이런 차이에도 이들 모델은 망각을 어쩔 수 없는 수동적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이와는 정반대의 설명도 있다. 뇌과학 연구가 발전하면서 나온 '의도적 망각'으로, 망각은 스트레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적으로' 학습되고 유전되어 왔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실험으로 입증됐다. 우리말로 '예쁜 꼬마선충'이라는 미생물과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망각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발견되고, 인간의 DNA에도 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망각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있다는 사실은 망각이 단순한 수동적 과정이 아니라 생명체의 자기 보호를 위한 능동적 과정임을 뜻한다. KAIST 김대식 교수는 "살아가면서 갑자기 망각하는 일이 늘어났다면 현재 일상을 스트레스로 여기고 빨리 과거로 만들려는 망각 유전자들의 활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양승동 KBS 사장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2014년 세월호 사고 당일 노래방에 갔던 사실을 "기억나지 않는다"며 부인했다가 야당이 시간, 장소, 신용카드 액수를 공개하자 "송구하다"며 시인했다. 야당이 신용카드 사용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아마 양 후보자는 끝까지 부인했을 것이다. 성추행 의혹으로 서울시장 출마 포기와 함께 정계 은퇴를 선언한 정봉주 전 의원도 문제의 호텔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역시 그랬을 것 같다. 이들의 망각은 유전자의 명령일까, 아니면 기억하면서도 발뺌하려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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