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는 일흔이 넘은 일본인 지인이 한 사람 있다. 이 일본인 지인은 한국 근대소설 가운데 이광수의 '유정'(1933)을 좋아한다. '유정'의 두 남녀 간의 사랑이 너무 피상적이어서 감정이입이 어렵다고 하면서도 일본인 지인은 소설 속 바이칼 호수 부분에 대해서는 감격어린 표정으로 칭찬을 한다. '가도 가도 벌판. 서리 맞은 마른 풀바다. 실개천 하나 없는 메마른 사막'으로 시작되는 '유정'의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 풍경 묘사는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다.
소설 '유정'은 친부녀 간은 아니지만 부녀 관계로 살아온 최석과 남정임, 두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다루고 있다. 딸처럼 키워 온 친구 딸을 사랑하는 남자와 아버지처럼 의지해 온 아버지 친구를 사랑하는 여자, 어떻게 보면 상당히 비윤리적인 애정 관계이다. 이 사랑을 순수하게 이상화시켜주는 것이 소설 속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분이다. 소설에서 바이칼 호수는 사회적 비난,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사랑의 감정, 죄책감 등, 사랑으로 인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결심한 최석의 마지막 여행지이다. 최석은 가을이 시작될 무렵 바이칼 호수에 도착하여 겨울까지 지낸다. 그리고 한 겨울, 광막한 이역 땅에서 홀로 외롭게 삶을 마감한다.
최석이 왜 죽음의 장소로 '성내어 날뛰는 물'과 '광막한 메마른 풀판'뿐인 겨울 바이칼 호수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소설가 이광수의 지리적 상상력이 거기까지였거나, 아니면 일본제국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조선이나 만주와 달리 시베리아는 고유한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었거나, 혹은 또 다른 이유가 거론될 수 있다. 이 모호한 이유들과는 별개로 최석이 시베리아를 마지막 여행지로 선택하고, 일본에 있던 남정임이 그런 최석을 단숨에 쫓아 갈 수 있을 정도로 1930년대 조선에서 대륙횡단여행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했던 듯하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일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준할 정도 심리적으로 가까운 곳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일본인 지인이 '유정'의 바이칼 호수 부분에 연연하는 것도 대륙횡단이 일반화되어 있던 시대에 대한 기억이나 동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담백하고도, 순수한 동경에 어설픈 정치적 해석을 가미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부산과 유럽이 하나로 이어져 있던 시대를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은 그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유정'이 발표되던 대륙횡단 시기에 식민지 조선은 아무런 주도권이 없었다. 그러나 대륙횡단 시대가 다시 열린다면 한국이 이제 그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