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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산책] 이럴 때가 기쁠 때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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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 다급한 빚 가까스로 갚았을 때 窶家急債券初了(구가급채권초료)

긴 장마에 비 새는데 날이 홀연 개였을 때 破屋長霖天忽晴(파옥장림천홀청)

거센 물결 휘둘리다 기슭에 배를 댈 때 駭浪飄舟依岸泊(해랑표주의안박)

깊은 산속 헤매는데 사람을 만났을 때 深山失路遇人行(심산실로우인행)

 

책 읽다 오묘한 뜻 별안간 깨달을 때 讀書斗覺微辭透(독서두각미사투)

시구 찾아 용쓰는데 멋진 시상 밀려올 때 覓句忽驚好料生(멱구홀경호료생)

명의가 병을 고쳐 묵은 병이 사라질 때 良醫對症沈痾去(양의대증침아거)

봄기운에 추위 가고 만물이 소생할 때 和煦破寒品物亨(화후파한품물형)

 

조선후기의 문인 윤기(尹愭:1741~1826)가 지은 이 작품에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의 목록이 8개나 나열되어 있다. 하고 한 날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빚을 다 갚고 나면,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다. 기나긴 장마에 비가 줄줄 새어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날이 환하게 밝아오면, 여호와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을 만난 기분이다. 거센 물결에 휘둘리던 배가 가까스로 기슭에 정박하거나,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데 사람을 만나게 되면 ‘후유’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어느 날 무심코 책을 읽다가 심오한 이치를 난데없이 번쩍! 깨닫게 되면, 머리에 엔도르핀이 확 솟구친다. 원고 청탁이 줄을 잇는데 지어놓은 시가 없어 전전긍긍할 때, 갑자기 시마(詩魔)라도 들었는지 작품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때면 ‘야호’ 하고 외치고 싶다. 명의를 만나 묵은 병을 즉석에서 고치거나, 그 지루하던 겨울이 지나가고 봄기운이 밀물처럼 밀려올 때도 강력 용수철을 신발 밑에 달고 허공으로 뜀박질을 하고 싶다.

어찌 그 뿐이랴. 3대독자가 딸 아홉을 연달아 낳은 뒤에 열 번째로 아들을 얻었을 때, 내가 애타도록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애타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을 때, 취업시험에서 무려 열아홉 번을 떨어진 뒤에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도 이 세상을 모두 다 가진 것처럼 풀쩍풀쩍 뛰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기쁨만을 쫓아다니지는 말 것. 진짜로 기쁘기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의 그 아찔한 슬픔이 꼭 필요하니까. 천길만길의 캄캄한 어둠이 있었기에 환한 등대가 태어날 수가 있었으니까.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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