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 재학 시절 겨울방학만 되면 두문불출했다. 온종일 운동복 차림에 이리저리 뒹굴면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하루 한 권 목표로 독서에 열중하였다. 몇 동아리에서 활동했지만, 겨울방학만큼은 어떤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전화가 오면 나는 '동면 중'이라 나갈 수 없다고 분명하게 이유를 말했다. 길고 긴 방학을 어떻게 보내고 새 학년을 맞을까 고민하다 생각해 낸 나만의 겨울나기 방법이었다. 공학도인 나에게 '겨울잠 독서'는 공부가 아니라 놀이와 휴식이었다.
동물마다 독특한 겨울나기 방법이 있다. 신천의 황조롱이, 왜가리, 쇠백로와 겨울마다 찾아오는 논병아리, 물닭도 자기만의 겨울나기 방법이 있다.
모든 생물에게는 본능적 리추얼(ritual)이 있다. 생명체는 철저하게 리추얼을 따라서 살아간다. 똑같은 모양의 집을 짓고, 새끼를 키운다. 동물은 어디서 배웠는지, DNA에 프로그램이 저장되었는지 정확하게 계절을 따라 살아간다. 곰, 다람쥐, 개구리, 물고기는 겨울잠을 잔다. 다람쥐의 심장 박동수는 1분에 150회 정도인데,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는 1분당 5회 정도로 확 줄어들어 에너지 소모가 극소화된다. 숲개구리는 동면 전에 섭취한 녹말을 포도당으로 바꾼 다음 체액에 넣는다. 이 포도당이 부동액 역할을 하여 체액이 얼지 않게 보호해 준다. 겨울철 자동차 냉각기에 부동액을 넣는 것과 같은 원리다. 송장개구리는 체액의 65%를 얼리고, 심장까지 정지시켜 겨울을 난다. 한결같이 생존을 위한 혹독한 과정이다. 겨울잠은 동물의 겨울 리추얼이다.
이어령 씨는 동물의 동면은 단순한 피한이나 방한이 아니라 가혹한 경쟁과 노동으로부터 풀려나는 따뜻한 시간이라고 했다. 겨울이 없다면 무한경쟁과 생존경쟁의 정글에서 잠시도 헤어나오지 못 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이 가져다준 사랑이요, 축복이다. 동면은 쉼의 시간, 생명을 비축하는 시간이다. 새로운 전진을 향한 준비다. 동면은 작은 죽음이다. 작은 백신을 통해 큰 병을 이기듯 작은 죽음을 경험하며 큰 죽음을 극복하고 큰 생명으로 나가는 것이다. 동면은 생명의 신비를 맛보는 심층 차원이다. 동면은 존재를 새롭게 한다. 생명체는 동면 중에도 성숙한다. 한겨울이 나이테 한 개를 만들 듯 더 성숙한 계절을 보내자.
우리 인생의 리추얼 중 하나는 전진과 휴식이다. 일과 잠은 둘 다 중요하다. 잠을 푹 자야 생기 있는 다음 날을 시작한다.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가장 먼저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잤는가'를 점검한다.
겨울나무는 옷을 벗고 존재의 짐을 가볍게 하여 생명을 비축한다. 농부는 꽃눈과 잎눈을 헤아리며 나뭇가지를 자른다. 모두 풍성한 생명을 맺기 위한 배려다. 농부는 가지 접붙임을 한다. 생명을 새롭게 이어 붙이는 것이다.
생명이란 자고 쉬고 비우고 가벼워져야 더욱 생명력이 살아서 역동하는 법이다. 가벼워지며, 버리며, 잘라낼 때 생명은 더 강인해진다.
생명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 달려만 가는 산업자본주의가 아니다. 성경에서 생명은 하나님의 숨에서 왔다고 했다. 자연의 숨, 하나님의 숨을 들이켜야 생명이 살아난다. 숨 쉴 틈 없이 달려가는 성장 지상주의의 결과는 성장이 아니라 질식이요, 생명의 고갈뿐이다. 숨 고르기, 심호흡이 필요하다.
인생의 겨울에 있는 사람들도 겨울의 추위보다는 생명의 따스한 사랑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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