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⑩열망. 김영숙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그래도 난 앞으로 태어날 내 자식한테만은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버둥거려봤지만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 그 중에도 제일 하고 싶던 공부를 맘껏 하지 못해 마음에 한이 됐어. 때론 부모님이 원망스럽고 왜 내가 태어났는지 불만스럽기 그지없던 때도 있었어. 그래서 맘 독하게 먹고 우리자식한테는 대물려 주지 말자, 하고 생각한 끝에 선택한 길이야."

나는 마음과는 달리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머나먼 월남의 전쟁터로 떠난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잠시 억장이 무너져 입을 딱 벌린 채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진정 내 마음속엔 어디든 가서 돈만 많이 벌어온다면 하는 얄팍한 계산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용병, 그는 드디어 나라를 위해서도 떠나야했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돈을 벌기위해 그 길을 순순히 택했는지도 차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8. 세월은 흐르고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에 있는 육군 제3사관학교에서 초대장을 보내왔다. 생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취지에서 치러지는 행사였다. 들뜬 마음으로 향했다. 아련한 기억이 머릿속을 채워온다. 언제였던가. 벌써 44년이 흐른 세월이다. 뱃고동소리가 멀어지는 부둣가, 많은 군인들이 몸을 싣고 향하는 곳은 월남의 전쟁터였다. 못내 아쉬운 가족을 뒤로하고 이별의 순간 어금니를 깨물던 당신과 나의 모습, 이젠 아련한 추억으로 내 가슴에 머문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임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 같은 겨레마음 임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 같은 겨레마음 임의 뒤를 따르리라"

귓속을 파고들며 쟁쟁하게 울려오던 서글픈 시간, 나는 몸을 움츠리고 가슴을 떨었다. 과연 살아 돌아올 것인가, 하는 불안함이 엄습해오고 제발 무사귀환을 빌었던 내 작은 소망이 무너지는 그날이 또다시 스멀스멀 내 머릿속을 채워온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그는 지키고 싶었겠지만 상황이 여건이 안 됐을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이해하면서도 서운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가끔 눈물짓곤 한다.

"꼭 살아 돌아오세요."

"알았어. 반드시 다시 올게."

그는 떠났고 나는 홀로 남았다. 하지만 그는 '살아'만 빼고 약속을 지켰다. 돌아오긴 했으니까. 한줌 재로 그는 국립묘지에 묻혔다. 만 2개월 만에...... 졸지에 유복자가 된 내 아들은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육군 제3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평생 군인의 길을 걷겠다고 한다.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사관생도들이 씩씩한 걸음걸이로 앞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을 한다. 하얀색 상하의에 군모만이 색깔을 달리한 모습들이다. 나는 그 옛날이 자꾸만 떠올라 눈물을 내비쳤다. 어머니는 강하다. 군인의 아내나 어머니는 더더욱 강하다. 그러므로 결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내비쳐서는 안 된다. 이런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결국 소리 내 울고 말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오른 탓이었다. 주변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나는 의식하지 않고 연신 훌쩍였다. 늠름하고 장한 내 아들보다 먼 날 나를 홀로 두고 떠나버린 남편이 사무치게 떠올라서였다. 그는 왜 꼭 월남으로 떠나야만 했던가. 물론 나라의 부름도 있었겠지만 가난이 그를 용병으로 등 떠밀었는지도 모른다. 1960년대 지긋지긋한 가난이 삶도 뒤죽박죽 만들어버렸고 사랑도 결코 온전히 지켜낼 수 없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배고픔이 우선이었기에 피폐된 정신은 여러 가지 행태로 나타나곤 했다. 단 돈 몇 푼에 여자는 술집으로 식모로 팔려가기도 했고 남자는 일자리를 찾아 먼 외국으로 즉 사우디 같은 중동으로 노가다현장을 뛰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정녕 먼 얘기다. 먹을 것이 넘쳐흘러 먹기 싫어 안 먹는다. 부지런한 자에게는 언제나 풍족한 삶이 보장되는 세상, 배우고 싶으면 아무 때고 공부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가 나는 너무도 좋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그가 내 곁을 떠나고 난 다음 나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마냥 그럴 수만은 없었다. 어느 때는 목숨을 끊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내 뱃속에 죄 없는 한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래, 한번 살아보자. 이보다 더한 삶도 살아왔는데 못살게 뭐 있겠는가. 모든 거 훌훌 털고 새롭게 일어서보자. 굳은 각오가 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언젠가 태어날 자식을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 번 용기를 가졌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는 날도 나는 모진 맘으로 세상과 부딪쳤다. 그러다보니 세월은 흐르고 어느새 세상 밖으로 나온 내 아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성장하고 있었다.

모든 근심걱정을 접은 뒤 어느 정도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이 평온해지자 나는 다시금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이 되살아났다. 아들이 군에 입대한 다음이었다. 망설임 없이 학원 문을 두드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그 결과 드디어 나는 정규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모두들 환호를 하면서도 의아한 눈빛을 날렸다. 나이 50이 넘어 대학생이라니, 손자 벌 되는 학생들과 어찌 함께 공부를 한단 말인가. 등록금으로 맛있는 거 사먹고 여행이나 다닐 일이지, 하고 만류하는 친구 이웃 그리고 여러 지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당당하게 강의를 듣고 책을 옆구리에 낀 채 교정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모 대학 강사로 강단에 섰다. 상담학을 전공한 나는 항상 많은 사람들을 접하며 색다르고 즐거운 인생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날의 서글픈 과거는 잊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내가 한없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나이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배움의 문턱이 조금 높기는 하지만 열심히만 한다면 아무런 걸림이 없다. 그러므로 내 현재의 삶은 평화롭고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이승에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만큼 남았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남은 생 더욱더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련다. 100세 시대, 그 절반이상을 살아버린 내가 이제 무엇을 더 바라고 욕심을 부리겠는가. 지금의 나는 진정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 다만 남은 꿈과 희망이 있다면 자식 건강하고 내 생애 최고인 공부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 행복한 시간들이다.〈끝〉(4월2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김정곤의 '늦깎이 인생' 첫 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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