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은 듯 읽지 않은 바로 그 책.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를 덜컥 사서 실망을 자주 해본 독자들은 고전을 집으시라. 더구나 세상으로부터 많은 실망을 경험한 터라 책 광고에까지 속고 싶지 않다면… 수많은 고전 중에서도 셰익스피어 작품을 골랐다면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아낀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때에도 셰익스피어 한 명만은 못 넘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르네상스의 정점기인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 잉글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존 셰익스피어는 피혁 가공업자로서 한때는 사업이 번창하였으나, 셰익스피어가 어릴 적에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이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대학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문예 부흥기의 문학적 세례를 한 몸에 받은 듯 뛰어난 작품을 우리에게 남겼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비극으로 꼽히는 '리어 왕'은 고대 켈트족 신화로 알려진 레어 왕(King Leir)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총 5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셰익스피어가 집중적으로 비극을 집필하던 시기인 1605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리어 왕'은 외양만 믿고 경솔한 판단을 했다가 믿었던 딸들에게 배신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노년의 왕을 통해서 진실의 가치를 되새기고 나아가 인간 정체성에 대해 냉혹하게 성찰한 작품이다.
'내가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냐?'(47쪽) 뜬금없는 이 말은 리어의 단순한 물음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존재론적 질문에 가깝다.
리어 왕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이 다스리던 영토와 권력을 딸 세 명에게 미리 나눠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기이하다. 딸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경쟁시키고 그 표현하는 모습에 따라 나눠줄 몫을 결정하는 식이다.
노년의 리어는 나이가 들었지만 지혜는 그에 못 미치는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보여준다.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두 딸에게 권력을 다 넘겨줘 버리는 그의 모습은 비극의 전조를 암시한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교언영색으로 아버지를 현혹하여 재산을 물려받지만 셋째 딸은 진실한 말로 오히려 판단력 약한 아버지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재산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는 아버지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두 딸에게서 폐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두 딸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어릴 적부터 자녀들을 대할 때 그 양육방식에 문제는 없었을까? 리어 왕이 파국을 맞게 된 데는 오히려 그의 성격적 결함과 잘못된 선택이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이 슬픔의 무게에 우리는 복종해야 합니다. 말해야 하는 바가 아니라, 느끼는 바를 말해야만 합니다.'(188쪽) 5막의 마지막 대사이다. 닥쳐온 슬픔을 충실히 받아들일 때 새롭게 일어설 힘이 생겨남을 암시하고 있다.
리어 왕의 자산 처리 방식은 노후 은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년의 자산관리는 고수익으로 유혹하는 리스크 높은 상품에 투자하기보다 안정적인 상품에 포트폴리오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자산관리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이 들수록 달콤한 말로 다가오는 사람보다 진실한 마음을 가진 이를 알아보는 지혜를 가다듬어야 한다. 내가 받을 사랑에 집착하기보다 내가 먼저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리어 왕을 반면교사로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배태만 학이사 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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