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너는 나에게 누구냐?

박병욱 대구중앙교회 대표 목사

박병욱 대구중앙교회 대표 목사
박병욱 대구중앙교회 대표 목사

랍비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밤이 끝나고 낮이 시작되는 새벽 시간을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느냐?" 제자들이 말했다. "멀리서 개와 양을 구분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구분할 수 있을 때입니까?" 랍비가 말했다. "아니다." "그럼 언제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에 현명한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너희 형제나 자매를 알아볼 만큼 너희 안에 빛이 충만할 때다."

여배우 장모 씨의 자살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늘상 소속사 대표에게 폭행을 당하고 성상납을 강요당했다니 처음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돈 없고 부모 없는 장 씨가 그 마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는 소속사와 계약해지 시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물도록 한 불평등 계약 때문이었다. 이름하여 '노예계약'이다. 돈 벌려고 출근하는 직장에서 손찌검을 당하다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성행위까지 강요당했다니, 회사 대표는 기획사의 간판을 걸고 악덕 포주 노릇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참담하다. 우리 법체계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국가가 한 여인을 자살에 이르도록 방조한 셈이다. 사회가 구성원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장 씨 한 사람의 자살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도움받을 방법이 없는 우리 사회 약자의 자살이다.

이런 사회는 이미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수준으로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데 파괴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냥 '동물'이다. 동물은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야 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산다.

사람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사회성이다. 약한 사람도 사회를 이루면 호랑이도 코끼리도 그 어떤 적도 물리친다. 생존과 문명의 기초가 사회다. 사회가 튼튼해지는 길은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결국 정의가 생존과 문명의 기초가 되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다. 구성원 각자가 사회의 정의로운 판단과 지지를 의지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타인을 물화, 대상화, 도구화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이런 폭력이 사라질까? 사람을 바라보는 눈동자부터 바꾸어 보면 어떨까? '너'는 나에게 누구인가? 돈벌이의 이용물인가? 나에게 쾌락을 주는 도구인가? 장 씨의 회사 대표는 설마 자기 가족에게도 그렇게 잔혹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사전에 사랑이란 단어가 있었을까?

갑자기 귓가에 아이유가 부른 '너의 의미'가 들린다. 감미로운 첫사랑의 설렘이 살아난다. 얼마나 내 가슴을 떨리게 하는 너의 존재인가? 피처링하던 김창완의 목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넌, 나에게 누구냐?" 아, 진정한 '너'가 나타나는 순간이다.

유태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사람의 관계가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벗어나 '나와 너'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당신'의 관계로 살아가자.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의 절정은 '나와 신'의 관계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하나님이다.

만나는 모든 이를 하나님 대하듯 하자.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약자도 가장 높은 하나님처럼 존중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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