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님이 시집갈 때 부라더 미싱~'. 1970년대 혼수시장을 강타했던 부라더 미싱의 CM송이다. 당시 소 한 마리와 맞먹을 정도로 비싼 물건이었던 재봉틀은 집안의 재산목록 1호로 가보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문화·생활의 급격한 변화로 의생활에도 기성복이 정착되면서 재봉틀은 서서히 우리 일상에서 사라졌다. 15세에 미싱업에 뛰어들어 65년째 대구시 대신동 미싱골목을 지키고 있는 태창미싱의 곽병문(80) 대표는 대구 섬유산업의 흥망성쇠와 함께해온 미싱의 산증인이다. 곽 대표는 "최근 들어 가정용 소품을 비롯해 아이에게 건강한 옷을 직접 옷을 지어 입히려는 젊은 주부들이 늘어 수요도 있어 심심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서문시장 미싱골목 산증인

태창미싱은 시장과 달성공원 사이 미싱골목에 위치해 있다. 올해 팔순인 곽 대표는 집에서 15분 거리인 가게로 매일 걸어서 출근한다. 별일 없으면 종일 미싱하고 대화하고 씨름한다.
40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나는 25㎡ 남짓한 가게는 시간이 정지한 듯 영화에서나 나올 만한 분위기다. 150년이나 된 미국제 싱거미싱부터 현대 전자식 미싱까지 수백 대의 미싱이 가게 곳곳에 진열돼 있다. 진열대 위에도, 바닥에도, 그것도 모자라 벽에 '시계처럼' 붙어 있는 재봉틀도 있다. 곳곳이 떨어져 나간 간판도 옛것이다. 재봉틀 종류도 다양하다. 일반 의복용, 우산용, 니트용, 지퍼용, 단추구멍용, 오버로크용, 스카프용, 침구류용, 천막용, 신발용, 쌀포대용, 장갑용…. "특수용까지 합치면 수십 종류가 넘는다"고 했다. 지난 11일 미싱을 수리하러 온 배영자(76·서구 비산동) 씨는 "50여 년 전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왔는데, 아이들 옷이랑 바짓단, 이불, 베개, 보자기 등 모두 이 미싱으로 만들었다"면서 "오랜 세월 동안 손때가 묻어있고 정이 들어 아까워 고쳐 사용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중국 산둥성에서 태어난 곽 대표는 광복 직후 대구 대신동에 안착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를 졸업한 후 취직을 해야만 했다. "졸업하기 전 친구와 함께 취직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동산병원 맞은편 미싱상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직원이 사장으로부터 '이것도 수리 못 하냐?'며 혼나고 있었다. 안 가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사장이 '너는 할 수 있냐?'고 하길래 고쳤더니 사장이 직원을 내쫓고 나를 채용했다"고 했다. 곽 대표의 60여 년 미싱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곳에서 3년쯤 일하다 서울로 올라가 미싱 전문기술을 배웠다. 군 복무 후 다시 처음 있었던 미싱가게에 들어갔다.
당시 서문시장은 전국의 돈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 중심에는 미싱골목이 있었다. 곽 대표가 근무했던 미싱가게도 종업원을 10여 명이나 둘 정도로 잘됐다. 너무 바빠 밥을 먹을 시간도 없었다. 포항, 안동, 청송, 울진 등 경북은 물론 함안, 거창 등 경남권까지 출장을 다녔다. 미싱골목은 동산병원 앞길 확장, 임대료 인상 등으로 1970년쯤 대신동 네거리 북서쪽으로 이전했다.
곽 대표도 독립해 가게를 차렸다. 당시 대구 섬유산업의 전성기였다. 섬유공장에서 나온 각종 천은 양장점, 양복점, 일반 의류공장 등으로 흘러 들어가 옷이 되어 나왔다. 당연히 미싱도 불티나게 팔렸다. 미싱 물량도 부족해 현금을 주고도 몇 달을 기다려야 원하는 미싱을 구입할 수 있었다.
곽 대표의 미싱 판매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시 업자들은 미싱의 유통경로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근무한 경험과 군복무시절(의정부서 근무) 미싱회사와의 교분을 유지하고 있던 터라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루에 많게는 수백 대 팔았다. 모두 현금 박치기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수중에 돈이 넘쳤다. 술을 마시며 흥청망청 썼다. 사기도 당했다. "부동산을 구입하라고 조언하는 이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곽 대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후회가 되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 중국산이 들어와 국내시장을 초토화시켰다. 인건비는 날로 치솟았다. 국내에서 의류를 만드는 것보다 중국이나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만드는 게 더 경제적이었다. 가정용 미싱도 창고로 들어갔다. 여파가 미싱골목에도 찾아들었다. 예전처럼 찾는 사람도 줄었다.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도 없다. "가게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부모가 운영하던 가게를 물려받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여든 나이에도 여전한 손재주
곽 대표는 대신동 미싱골목의 살아있는 역사다. 1970년대에 형성된 미싱골목은 현재 40여 개 점포가 영업 중이다. 곽 대표는 미싱골목의 최고령자다. 한 장소에서 50년을 넘게 운영하다 보니 이제는 터줏대감이 되었다. 요즘은 판매는 거의 없고 대부분 고장 난 미싱을 수리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혼수품이라 버리기 아까워서 또는 필요해서 심심찮게 일거리가 들어온다. 내 기술을 아는지 먼 지역에서 찾아오는 이도 있다"며 껄껄 웃었다.
곽 대표는 미싱업으로 4남매(2남 2녀)를 잘 길러 출가시켰다. 그러나 물려받을 자식은 없다고 했다. "힘들잖아요. 미래도 없고. 그래서 인근에서 미싱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동생에게 물려줄 계획"고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곽 대표는 시간이 허락하면 유럽 성지 순례를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심심찮게 일거리도 들어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할 것이라고 했다. "미싱 일은 기술만 있으면 되니 이 나이까지도 일할 수 있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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