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여헌 선생의 20, 30대는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연속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정처없이 피난길에 올랐으며, 모진 고생으로 중병까지 앓았다. 호를 '여헌'(旅軒)이라 지은 것도 이런 연유다. 정처 없는 유랑을 의미하는 나그네(旅·여)와 일정한 거주공간을 지칭하는 집(軒·헌)의 상반되는 개념을 결합해 만든 호이다. 그러나 고달픈 피난길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7〉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8〉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9〉 광대한 학문체계를 집대성하다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留心道德(마음을 도덕에 두고)/ 立心敬誠(마음을 성경으로 세운다)/ 存心精一(마음을 정일하게 보존하고)/ 遊心宇宙(마음을 우주에 노닌다)/
평소 여헌 선생이 방 벽에 붙여둔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밝힌 좌우명의 한 구절이다. 죽는 날까지 그의 학문 탐구와 우주 사업은 이처럼 정밀하게 쉬지 않고 이루어졌다.
"아아, 나의 삶이 어찌 이리 기구한가?"
여헌 선생은 탄식했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했다. 조선 땅은 왜적의 칼날 아래 무참히 밟혔다.
여헌 선생도 가족을 거느리고 여러 지역의 친척과 친지를 찾아다니며 생존했다. 짐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기약 없이 인동을 떠나 금오산과 칠곡, 성주 등지로 거처를 옮겨가며 피난길에 올랐다.
막상 피난길에 올랐지만 여헌 선생은 종손이었던 만큼 10여 위(位)에 달하는 선세(先世)의 신주(神主)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당을 파고 광목으로 몇 겹을 싼 신주를 비롯한 제기들을 궤에 넣어 감추었다. 그런 다음 상주의 몸은 어쩔 수 없다며 어머니의 신주와 상복 한 벌, 네 말의 곡식, 주역 책 등을 챙겼다.
구미 금오산 골짜기로 몸을 피했지만, 왜적이 바로 코 앞인 구미 형곡동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로 옮겼다.
황망한 가운데 어머니의 소상(小喪)과 대상을 자형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치렀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배고픔의 해결이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다.
오랜 피난길에 여헌 선생은 병을 얻었다.
상을 당한 지난겨울에 구들장 없이 습한 곳에서 잠을 자고 마땅한 거처도 없이 이리저리 다니고, 무더위 속에서 아무 물이나 마셔 병이 난 것이다.
병환으로 한 달여 동안 고생을 하다가 대구 북구 읍내동에 있던 동서 조벽의 집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어느 정도 병도 나았다.
조금은 안정된 생활을 하자 여헌 선생은 다시 책을 잡았다. 학문의 뜻을 잊지 않은 것이다.
주역을 읽으며, 자신의 학문을 구체화했다. 이때(선조 27년, 1594년) 평설(平說)을 완성했다.
전란 중에도 여헌 선생의 학문은 무르익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고향 집이 죄다 불타 없어져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보따리를 싸 들고 가솔들과의 떠돌이 삶이 계속됐다.
"아아, 나그네가 됨이 나보다 더한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 실상이 이와 같으니, 호를 여헌(旅軒)이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