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7〉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8〉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9〉 광대한 학문체계를 집대성하다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서인 세력들은 어머니를 버리고 동생을 살해한 성리학적 윤리 강상을 저버리고, 외교정책 실패 등의 이유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앞세웠다.
여헌 선생은 광해군의 비도덕적인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조정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인조반정이 성공을 거두자 서서히 중앙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도덕 정치 회복에 대한 염원이지, 출사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인조반정 직후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인륜을 저버린 광해군의 행태와 실패한 외교정책은 백성들과 사림 전체의 지지를 온전히 얻어내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인조는 사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재야의 명망 높은 학자들을 징소했다.
산림학자(山林學者)로 불리는 재야 명망 높은 학자들을 조정에 등용해 그들의 고견을 듣고 정치에 반영하는 것은 물론 그들을 따르는 재야 사림들을 정권의 우호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여헌 선생은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학자로 가장 먼저 징소 대상이 됐다. 사헌부지평에 제수됐다.
그러나 여헌 선생은 인조의 교지에 응하지 않았다. 인조는 잇따라 성균관사업, 사헌부장령 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번번이 여헌 선생은 고사의 뜻을 밝히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2년, 반정에 가담해 큰 공을 세웠던 이괄이 2등 공신으로 책봉돼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접한 여헌 선생은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인조가 피신하고 있던 공주로 향했다.
여헌 선생은 인조에게 도덕적인 이상사회를 현실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주의 도덕적 자기 수양이 전제돼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경세론의 핵심인 건극론(建極論)을 제시했다.
극은 중국의 성인 우왕이 남긴 정치이념인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핵심사상이 되는 황극(皇極), 즉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정한 대도(大道)로서 중정(中正)의 도를 의미한다.
잠시 안정을 취하는 듯했지만, 조선은 바람 앞에 촛불처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인조는 강화도와 남한산성 등으로 몸을 피했다.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자 여헌 선생은 80대의 노구에다 병환 중인데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아 직접 선두에 섰다.
그러나 인조는 정묘조약을 맺고 후금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끝나자, 여헌 선생의 의병들은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해산했다.
여헌 선생은 후금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눈물을 흘리며 여러 날을 밤새도록 애통해했다.
여헌 선생은 조선의 명운이 오래도록 안정과 번영하기를 기원했지만, 그 간절한 소망도 끝내 비껴갔다. 산기슭을 내려오면서 깊은 회한에 잠긴 여헌 선생은 "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조선의 명운이여!"라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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