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창원의 기록여행] 서문시장의 어린이 노숙인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지난 4월 이래 부후생과에서 정리된 금년의 행려병 사망자수를 들쳐보면 179명중 1세 이상 12세 미만의 남녀고아의 사망률은 총수의 약 40%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보더라도 참혹한 내일의 운명이란 한숨과 눈물이~.'(남선경제신문 1947년 11월 15일)

해방의 환희는 짧았다. 기쁨이 사라진 그 자리는 가난과 굶주림이 치고 들어왔다. 그렇다고 그 고통이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적용되지는 않았다. 사회적으로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비참하게 다가왔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사회적 약자의 첫 줄에는 부모 없는 어린이가 섰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고아의 참상은 해방 이태 뒤에도 쭉 이어졌다. 행려병 사망자의 절반 가까이가 12세 미만의 고아였다.

아이들이 모두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 건 아니었다. 제 한 몸 지킬 힘조차 버거운 부모로부터 내팽개쳐진 부랑아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은 낮에는 거리에서 물품과 금전을 구걸했다. 밤에는 대구역 대합실이나 공회당으로 몰려들었다. 찬 바닥에 거적을 이불 삼아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이 날마다 100명은 되었다. 또 서문시장과 남문시장에서는 허기를 채우러 헤매다 해가 지면 한뎃잠 자는 아이들이 150명은 넘었다. 말하자면 어린이 노숙인이었다.

배곯는 아이들에게 공부는 사치였다. 당시 국민학교로 불렀던 초등학교 아동의 절반 가까이는 아예 학교에 가는 걸 포기했다. 게다가 학교에 나온 아이들 중에도 태반은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점심만이 아니었다. 점심을 굶는 아이 열 명 가운데 둘은 아침에 죽을 먹고, 반수는 저녁에 죽을 먹었다.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마저 굶거나, 점심을 굶고 겨우 저녁에 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는 식이었다.

대구 지역 초등학교의 비참한 사정은 엇비슷했다. 점심을 굶는 학생의 비율이 칠성초교 80%를 비롯해 비산초교 60%였다. 칠성초교 인근에는 전재민 등을 위해 임시로 지은 움막집인 토막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식량 부족이 한층 심했음을 짐작할 만하다. 그나마 대구에서는 남산초교의 사정이 나았다. 상업이 비교적 활발했던 시내 중심지와 가까워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이유일 게다.

경북은 어땠을까. 영덕의 경우 3월에 90%였던 초등학교 아동의 출석률은 배고픔의 고통이 커지자 반 토막이 났다. 출석한 아이들 셋 중에 둘은 도시락을 못 가져왔다. 울릉도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4월이 되자 학교로 등교한 초중등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산나물로 연명하며 쌀을 싣고 오는 배의 뱃고동 소리에 목을 매는 일이 벌어졌다. 상황이 이럴진대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었겠나.

아이들이 잘 먹고 당당하게 기를 펴고 성장하도록 하는 일.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무상급식과 무상교복에 발끈하고 고등학교 무상교육에 펄쩍 뛸 일이 아니다.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예산의 헤픈 씀씀이가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다시 5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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