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독립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정치권력에서 독립되지 않은 사법부는 권력의 법률 대리인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런 타락은 권력엔 떨칠 수 없는 유혹이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800~1896년 사이 연방 대법관 수는 일곱 차례나 바뀌었다. 그 이유는 매번 '정치적'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대법관 수를 정해 놓지 않은 헌법의 맹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법관 수가 9명으로 정해진 1896년을 기점으로 그 악습은 사라졌다. "그처럼 무도한 행위는 헌법 정신에 대한 침해"(우드로 윌슨 대통령)이고 "파괴적이며 특히 미국이라는 헌법 연합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벤저민 해리슨 대통령)는 인식이 보편화되면서다. 연방 대법관 수는 9명이란 '비공식 규범'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대법관 수는 9명으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악습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장본인은 역설적이게도 미국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으로, 대법관 수를 15명으로 늘리려 했다. 이른바 '대법원 재구성 계획'(court-packing plan)이다. 연방 대법원이 뉴딜 정책 관련 법률을 번번이 위헌으로 판결하자 자기편을 집어넣어 연방 대법원을 거수기로 만드는 게 그 목적이었다. 야당의 반대와 여당의 '반란'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이는 사법부 장악이 권력자에게 얼마나 유혹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미선 헌법재판관 임명 강행은 이를 재확인해 준다. 이해 충돌을 회피하지 않고 주식 투자를 한 도덕적 해이로 보나 중요한 사안마다 입장을 유보하거나 생각해 보지 않은 자질의 문제로 보나 그는 부적격이었다. 그럼에도 임명을 강행한 것은 여론의 비판을 감수할 만큼 이익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임명으로 친정부 성향 재판관은 위헌 결정 정족수인 6명으로 늘어났다. '그놈의 헌법 때문에'라고 한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러워해 마지않을 '헌법재판소 재구성'이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헌법은 완전무결하거나 영원하지 않고, 헌법 해석 역시 고정불변이거나 무오류일 순 없다"는 지난해 문 대통령의 말은 이를 예고하는 듯하다.
이에 화답하듯 이 재판관도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처음 지명 소식을 듣고 지인으로부터 역사적 소명이 있을 터이니 당당하란 말을 들었다. 그 말처럼 저에게 주어진 소임과 소명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갖은 비판을 무릅쓰고 임명해 줬으니 문 정부의 충실한 법률 대리인이 되겠다는 서약으로 들린다.
처칠은 히틀러의 정권 장악으로 전운이 감돌던 1935년 옥스퍼드대학의 토론 클럽인 '옥스퍼드 유니언'이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국왕을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다"고 결의하자 "참으로 한심하고 치졸한 고백이며… 불온하고 역겨운 시대의 징후"라고 개탄했다. 문재인판(版) 헌법재판소 재구성도 같은 개탄을 자아낸다. '합헌적 독재로 나아가려는 불온하고 역겨운 시대의 징후'라는.
사족-드물지만 사법부 장악 유혹을 뿌리친 경우도 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으로, 2017년 법무장관에게 대법관 임명권을 부여해 대법원을 여당이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한 2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법원에 이어 헌재까지 자기편으로 재구성한 이 나라 대통령에겐 얼빠진 짓으로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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