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흥]어서 오시다~, 남해

이순신의 마지막 싸움 노량해전 현장과 가까운 이락사
이성계가 개명한 금산 보리암은 남해 관광의 지존
명승이 된 죽방렴, 다랑이논은 생활의 지혜
보물섬이라는 별칭이 어색하지 않은 남해도
4일부터는 멸치축제도 열려요~

사천에서 남해도로 들어가는 초입에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가 놓였다. 주변으로 유채꽃이 피어 바다와 색감을 조율한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사천에서 남해도로 들어가는 초입에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가 놓였다. 주변으로 유채꽃이 피어 바다와 색감을 조율한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자칭타칭 '보물섬'이다. 자랑할 게 많고 둘러볼 곳도 많다는 자신감이다. 행정구역 이름도 오죽하면 남해일까. 오른쪽으로 통영을, 왼쪽으로 여수를 두고 있다. 웬만큼 해무가 없으면 통영과 여수가 보인다. 자연스레 한데 묶여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섬 크기 서열도 국내 다섯 번째다. 달성군과 달서구를 뺀 대구와 비슷한 크기다. 남쪽 바다가 얼마나 넓은데 이기 다 니끼가, 라고 따져본들 수긍해야할 판이다.

대구경북의 '어서 오이소~'에 해당하는 '어서 오시다~'가 관광객을 맞는다. 45년간 남해도 진입 위병소 역할을 하던 붉은 다리, 남해대교를 보면서 남해도로 들어선다. 남해도와 육지를 잇는 유일한 다리 남해대교 옆으로 노량대교가 개통된 덕분이다. 귀에 익은 노량이다. 대하드라마와 역사책에서 자주 듣고 보던 이순신의 흔적, 노량이 이곳이다.

이락사로 오르는 길에 노송 20여 그루가 좌우로 도열해 있다. 비장감이 물씬 풍긴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이락사로 오르는 길에 노송 20여 그루가 좌우로 도열해 있다. 비장감이 물씬 풍긴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 이락사

정유재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자 왜군은 철수를 시작한다. 일본으로 돌아갈 바닷길은 노량 앞바다였다. 왜군은 이순신이 두려웠지만 이 길을 건너지 않고는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마지막 싸움을 벌였고 전사한다.

이락사는 이순신(李)이 떨어졌다(落)는 이름의 사당(祠)이다. 유허비가 있는 곳에는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는 대성운해(大星隕海)란 현판이 따로 걸렸다. 모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빗돌에서 이락사까지는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소나무숲이라 부르기 애매한 수다. 수가 적다하여 초라한 건 아니다. 명량에서 이순신은 열두 척의 배로도 충분했다. 20그루가 채 안 되지만 줄기가 여러 가닥이라 좀 더 많아 보이는 노송이다. 이락사까지 가는 걸음들을 호위한다.

작가 김훈은 '역사가 기록이 아니라 풍경과 표정으로 남아있는 곳'으로 이락사를 꼽았다. '늘 엄숙하고 비장한 기운이 서려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했다. 십분 이해되고도 남는다.

이락사 안에는 동백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지나치지 못하고 꽃을 유허비 앞에 가져다 놓는다. 손바닥만 한 선홍빛 꽃잎은 그를 기억하러 온 후세가 바친 훈장처럼 보인다.

이락사 현판을 넘자 바로 보이는 이순신 유허비. 유허비각 상단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이락사 현판을 넘자 바로 보이는 이순신 유허비. 유허비각 상단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대성운해(大星隕海)'란 현판이 보인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적이 알고 싶어했을 죽음

이순신 사후 400년째던 1998년, 공교롭게도 남해 출신이던 해군참모총장 류삼남 장군은 '전장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말을 8m 높이의 빗돌에 급한 느낌 그대로 새겨 이락사 소나무숲 초입에 세워둔다.

임금도 포기한 나라를 구한 영웅, 그의 죽음이 400년 뒤 기억되는 건 전혀 억지스럽지 않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오스만튀르크의 후예 터키는 1953년 500주년 전승기념식을 가졌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일제는 유허비에 손을 대지 않았다. 유혹이 컸을 것이다. 133척을 끌고도 명량에서 이순신의 12척에 패퇴한 건 그들에게 치욕의 역사다. 1597년 당대에도 해양 기술의 우위를 자랑하던 일본 해군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이었기에 패배를 고백한다. 임진왜란의 이순신은 현재 일본 역사 교과서(學硏이 출판한 '중학역사' 등)에도 남아있다. 의병과 이순신의 활약으로 조선침략에 실패했다고 적시해뒀다.

쌍홍문을 통해 본 남해안 군도. 보리암의 명성에 가려 찾는 이가 드물다. 조선 중기 문신 주세붕은 쌍홍문이 있어 금산에 오른다고 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큰 별이 땅에 떨어지다'란 뜻의 현판 대성운해(大星隕海). 이순신 유허비를 감싸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이락사에서 우측으로 첨망대 가는 길이 있다. 전망하는 곳이 아니라 우러러보는 곳이다. 가는 길이 내내 호젓하다. 진짜배기 소나무 숲길 500미터 남짓이다. 동백나무, 편백나무가 간간이 섞였다. 피톤치드가 해풍에 섞여 폐부에 흡착된다. 비염 환자들도 코가 뻥 뚫릴 만큼이다.

1991년 건립된 첨망대에 오르면 서쪽으로 열린 좁은 바다가 앞마당처럼 보인다. 1598년 조선과 일본이 국운을 걸고 혈전을 벌였던, 큰 별 이순신이 떨어졌던 바다다. 일본군은 기어이 이곳을 벗어나려 했고 이순신은 기필코 섬멸하려 했다. 총구와 대포가 쏟아내던 화약 연기가 이곳을 가득 채웠으리라. 지금은 건너편 광양제철소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른다. 며칠 전, 4월 28일은 이순신 탄신일이었다.

남해 관광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금산. 또 금산의 절반이라 할 보리암의 모습. 암자에서 내다 본 바다 위 섬들이 마치 천상의 섬처럼 떠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쌍홍문을 통해 본 남해안 군도. 보리암의 명성에 가려 찾는 이가 드물다. 조선 중기 문신 주세붕은 쌍홍문이 있어 금산에 오른다고 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남해 관광의 지존, 금산 보리암

남해 관광의 절반은 금산이다. 본래 보광산인 것을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 후 왕조 창업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며, 산 전체를 비단으로 감싸려 했으나 실현 불가라 이름에만 비단을 씌웠다는 얘기가 있다. 그래서 금산(錦山)이다. 해발고도 700m 남짓. 고만고만한 높이다. 산행 길이도 짧다. 유채꽃으로 이름깨나 알린 두모마을에서 시작하는 장거리 산행코스를 잡아도 정상까지 2.2km다. 산을 오르는 내내 바다를 본다. 섬휘파람새 소리도 서라운드 입체음향으로 들린다. 오르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금세 오른다 해서 금산인가 싶다.

금산을 여러 번 타 본 이들은 '쌍홍문'을 꼭 보라고 한다. 무협지 제목같기도 한 '쌍홍문'이다. 문자대로 해석하면 두 개의 무지개문이다. 멀리서 보면 해골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 문신 주세붕이 '쌍홍문이 있어 금산에 오른다(由虹門上錦山, 보리암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금산 정상인데 봉수대로 쓰였던 정상부 아래 큰 바위에 주세붕이 써놓은 이 글귀가 있다)고 했을 만큼 신기한 볼거리였다. 그런데 관광객들이 코앞에 두고도 놓치는 곳이다. 보리암 명성에 가린 탓이다.

온라인을 통해 인증샷 열풍을 몰고 온 금산산장. 열에 아홉은 컵라면을 먹고 사진을 찍는다. 상주은모래비치가 가까이 보인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남해 관광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금산. 또 금산의 절반이라 할 보리암의 모습. 암자에서 내다 본 바다 위 섬들이 마치 천상의 섬처럼 떠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보리암은 그만큼 유명하다. 암자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불자와 관광객 공히 보리암에 닿으려 땀 흘려 걷는다. 불자는 불공으로 땀의 보답을, 관광객은 탁 트인 전경에 땀을 씻어낸다. 암자인 보리암으로 가는 길은 대형 사찰에 버금간다. 통상 암자를 떠올릴 때면 바위를 짚어가며 오르는, 갑자기 멧돼지가 길 좀 비키라며 나타나는 험지가 아니다. 암자 가는 길이 이렇게 넓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잘 정비돼 있다.

지족해협을 가로지르는 창선교에서 본 국가 지정 명승 죽방렴의 모습. 남해에는 23개의 죽방렴이 설치돼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온라인을 통해 인증샷 열풍을 몰고 온 금산산장. 열에 아홉은 컵라면을 먹고 사진을 찍는다. 상주은모래비치가 가까이 보인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얼떨결에 온라인 스타, 금산산장

보리암의 온라인 스타는 뜻밖에도 '금산산장'이라는 곳이다. 지금은 종방된, 하루 자고 이틀 논다는 프로그램에 소개됐다. 프로그램에서는 진행자들이 이곳에서 막걸리를 곁들여 끼니를 해결했다. 이게 전파를 탄 뒤 일장일단이 생겼다. 일장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 것이고, 일단은 편법을 참지 못한 지적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국립공원에서 조리 행위를 해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매점 정도로 역할이 한정됐지만 컵라면을 먹으러 오는 이들이 생겼다. 조리 행위는 제어 가능한 것이었지만 먹는 행위는 제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에 소개돼 인증샷 대잔치로 이어진다. 인증 행위도 통제가 쉽지 않긴 마찬가지다.

야외에서 먹는 라면은 요즘 말로 진리에 가깝다. 라면은 낚시터에서 먹는 라면과 야구장에서 먹는 라면을 최고로 치는데 야외에서 지루할 때쯤 먹는다는 게 교집합이다. 이곳에서 먹는 것도 비슷한 효과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심비 높은 사치를 부릴 수 있다는 거다. 해풍과 산바람에 쫄깃해진 면발이 쇠고기 국물맛을 베이스로 한 라면 수프를 빨아들여 보리암까지 1km 남짓 걸어 올라온 이들의 식욕을 최대로 끌어올리는데 바다를 보며 라면을 먹는다는 사치성 우월감이 결합돼 종국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자랑으로 이어진다.

이곳 주민들은 척박한 자연 환경을 손질해 다랑이논으로 승화시켰다. 사진은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논.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지족해협을 가로지르는 창선교에서 본 국가 지정 명승 죽방렴의 모습. 남해에는 23개의 죽방렴이 설치돼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물고기들아 어서 오시다, 죽방렴

남해에는 특이한 명승 두 곳이 있다. 건축 기술이나 자연 경관의 공이 아니다. 먹고 사는 것과 관련 있다. 죽방렴과 다랑이논이다. 명승의 개념 전환이다. 문화재로 접근하려니 현학적인 느낌이다. 삶의 지혜로 받은 훈장이다.

죽방렴은 대나무로 짠 고기잡이 그물이다. 지족해협 폭 350m 물길 곳곳에 설치돼 있다. 유구한 역사의 어렵법이다. 문헌상에는 1496년부터라지만 그보다 더 오래 됐을 거라 학계는 짐작한다. 시속 15㎞ 안팎의 빠른 물살과 조수 차를 이용한다. V자형으로 생겼다. 기둥 역할을 하는 말목을 군데군데 박고 그 사이를 대나무 발로 엮어 막는다. 예각을 이루는 곳에 둥근 공간이 있다. '임통'이라 부른다.

물고기가 해류를 이기지 못해 그 공간에 들어왔다 갇힌다. '전방에 죽방렴!'이라고 첨병이 외쳐도 우르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돌아나갈 묘수가 없다. 썰물 때가 되면 죽방렴 주인이 임통에 들어가 물고기떼를 뜰채로 건져낸다. 여러 물고기가 잡힌다. 멸치도 유구한 세월 동안 이곳에서 잡혀들 왔다. 축제를 열 만큼이다. 멸치축제가 당장 4일부터다.

사천에서 남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삼천포대교와 창선대교에서부터 드문드문 보인다. 창선도와 남해도를 연결하는 창선교 (창선대교가 아니다) 가 지나는 지족해협에서 보는 게 낫다. 죽방렴은 함부로 옮기기 어렵다. 하나 설치하는 데 억 단위란 말이 들려온다.

남해 대표음식으로 자리잡은 멸치쌈밥. 대멸(큰 멸치)을 자작하게 조려내 쌈과 함께 먹는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이곳 주민들은 척박한 자연 환경을 손질해 다랑이논으로 승화시켰다. 사진은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논.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먹고 살려다 보니 다랑이논

또 하나의 특이한 명승, 가천마을 다랑이논이다. 먹고 살려고 발버둥 쳐 만든 계단식 논이다. 먹고 사는 일이 절경으로 탄생한 셈이다. 농사 기술과 토목 기술의 승리라기보다 강인한 생명력에 보내는 찬사다.

가천마을 뒤로는 설흘산이 높고 앞바다는 파도가 셌다. 경사가 급한 지형에 들어선 마을이었다. 고기잡이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됐다. 농사를 지어야 했다. 석축을 쌓고 땅을 뒤집어 물을 댔다. 급경사지에 논이 층층이 놓였다. 100층 이상이다. 철에 따라 풍경도 조금씩 바뀐다. 지난달까지는 층층이 유채꽃이었다.

마을 뒤 설흘산과 마을 앞 트인 바다 사이 마을에는 관광객이 넘실댄다. 아무래도 마을의 터줏대감은 암수바위다. 조선 영조 시기인 1751년 남해현령이 꿈을 꾼 뒤 발견했다는 돌덩이 두 개를 가리킨다. 높이 4~6m의 기다란 바위는 남근석처럼 보인다. 해안가 마을에서 더러 볼 수 있는 안전과 풍어의 상징물이다. 마을주민들은 미륵바위로 부른다.

남해 대표음식으로 자리잡은 멸치쌈밥. 대멸(큰 멸치)을 자작하게 조려내 쌈과 함께 먹는다. 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별미의 시간

남해의 봄 대표 식단으로 멸치쌈밥을 꼽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멸치축제가 4일부터 열린다. 큰 멸치, 이른바 '대멸'이 올라오는 시기다. 대멸은 생물 그대로 회로 먹거나 쌈을 싸먹을 수 있다. 미조항을 손에 꼽는데 남해 토박이에게 물으니 어디서든 비슷하다는 답이 온다. 포털사이트와 지도앱에서 취합한 이런 평가, 저런 평점을 비교해도 그렇다. 맛집 당첨 여부는 각자의 식복과 허기에 달렸다.

멸치찌개처럼 뵈는 상이 차려진다. 쌈을 함께 준다. 조리법은 단순하다. 멸치에 버섯, 시래기, 대파, 양념 등을 넣고 조린다. 단순한 조리법으로 일미를 만들어내는 게 기술이고 손맛이다. 찌개 속 멸치가 제법 크다. 성인 남성 손가락 굵기다. 국물용 멸치가 마르기 전의 크기인 듯하다. 뼈를 발라낼 것까진 아니다. 뼈를 씹어야 고소함이 배가된다. 떡볶이 국물 같은 달짝지근하면서 매콤한 국물에 밥을 비벼먹는 건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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