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7〉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8〉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9〉 광대한 학문체계를 집대성하다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여헌 선생은 학문의 온축된 성과를 '역학도설'이라는 저술로 구체화하는 한편 부지암정사의 낙성으로 인해 강학 활동에 더욱 전념했다.
그리고 인동과 선산 지역 선현들을 위한 여러 행사를 주관하면서 선현에 대한 추숭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추숭 작업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방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를 계기로 영남 일대의 학풍을 재건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여헌 선생은 전란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민심과 무너진 선비의 기풍을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여헌 선생은 "사람들이 우리 고을을 추로의 고장으로 칭한다"고 할 정도로 선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처럼 선현에 대한 존숭의식은 송당학파(松堂學派)의 여러 학자에 대한 추숭 작업을 통해 실현됐다.
이와 더불어 선현의 묘를 가꾸고 참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지역 서원을 정비하고, 서원의 기능과 역할을 중시했다.
서원은 교육과 제향이라는 고유 기능과 역할이 어느 하나 결핍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서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한 여헌 선생은 임란 이후 인동과 선산지역 내 무너진 서원을 복구하고 제사의식을 정비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가장 먼저 금오서원(金烏書院) 중수에 나섰다. 금오서원은 명종 때 박영의 문인이었던 최응룡과 김취문이 길재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금오산 아래에 건립됐다.
금오서원은 전란의 참화를 피하지 못하였고, 몇 년간 방치된 채 폐허로 남아 있었다.
낙동강과 감천이 만나는 물길이 보이는 구미 선산읍 원리에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의 길재(吉再), 조선의 김종직(金宗直)·정붕(鄭鵬)·박영(朴英)·장현광(張顯光) 등을 봉향했다.
또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소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여헌 선생은 사림의 연원이자 충절로 이름이 드높은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의 복원 사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밖에 여헌 선생은 정몽주의 학문과 덕행을 추념하기 위해 포항 오천서원, 김굉필을 추모하기 위한 성주 천곡서원, 이언적을 배향한 경주 옥산서원·서악서원, 김종직을 기리기 위한 밀양 예림서원, 이황의 학행을 기리기 위한 안동 여강서원 등의 복원에도 앞장섰다.
서원 재건과 더불어 관학이었던 향교(鄕校) 복원에도 두 팔을 걷어붙였다.
향교 복원을 통해 유학적 기풍을 진작하고, 무너져 가는 윤리 강상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영남지역의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던 인동향교(仁同鄕校)는 왜적의 병화로 소실됐다. 인동향교가 복원되면서 인동 지역이 인륜이 꽃피는 고을로 거듭 태어나길 기원하고, 유학이 흥성하기를 기대했다.
이처럼 서원과 향교는 여헌 선생이 어려서 꿈꾸었던 담대한 이상과 목표, 방대한 이론체계가 구현되는 통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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