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나도 눈물을 보였다. 나는 해병대 소위 정복을 하고 육군에 있을 때 근무하던 부대의 대대장을 찾아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중대장과 함께 내가 있던 내무반을 방문했다. 감개가 무량했다. 나를 몽둥이로 때리던 아이가 병장을 달고 최고 선임자가 되어 있었다. 나한테 미안했었다고 큰소리로 나한테 "충성" 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건강하니 군 생활도 순탄했다. 그러나 대위로 진급하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진로 문제였다. 솔직히 나 같이 고학력 출신도, 배경이 좋은 것도, 특출한 소질을 가지지 않은 자는 올라갈 자리가 애매했다. 운이 좋아 영관급으로 진급해 보았자, 그때 사회에 나오면 내 나이가 얼마나 되는가? 결혼도 해야 하는데 전세방이라도 얻을 돈이 생기는가? 그렇다고 지금 제대를 하면 취직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 머리가 아프다.
더구나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어 가야 할 길도 더 안 보이는데 이래도 저래도 답이 없다. 우물쭈물하는 공백은 술이 메꾸었다. '술! 많이도 퍼마셨다. 차라리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소연할 걸!' '선두에 설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 더불어 낙오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 1978년 백령도에서 해병대 대위 제대한다. 그리고 국립묘지에 있는 친구 김광오한테 제대 신고를 한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서울대 앞, 신림동 달동네에 살고 있었다. 강제 철거된 판자촌 주민에게 구청에서 관악산 앞 작은 산에 한 가구당 택지 12(?) 평씩 분배해 주었다. 그것이 신림동 달동네다. 거기에 새로운 판자촌이 생겼다. 수도, 하수도, 전기도 없었다. 화장실이 몇 군데 있었는데 관리자가 없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고 겨울에는 똥과 오줌이 얼어붙어 산처럼 쌓여 사용할 수가 없었다. 집마다 땅을 파서 화장실과 우물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화장실과 우물 거리가 가까워 물에서 똥, 오줌 냄새가 났다. 그 우물과 화장실을 내가 만들었다.
냄새가 지독해서 더 깊이 파고 파이프를 박고 펌프를 세우니 냄새가 덜 했다. 그러나 식수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때 생긴 것이 물지게꾼과 똥 퍼 가는 직업이다. 그들은 "똥 퍼, 똥 퍼" 하며 외치고 다녔고, 산 밑에 수도가 있어 산 위까지 가기가 힘이 들어 그들의 기세는 등등했다. 먹지는 못 해도 물은 있어야 했고 똥은 퍼야 했다. 또 한 가구당 한 사람씩 나 오라 해서 노역을 시키고 밀가루를 배급받았다. 얼마 후 전기가 들어왔지만, 전기료를 낼 돈이 없자, 사람들은 전선을 옷핀으로 찔러 사용하다가 감전 사고가 나기도 하고 밤에 똥을 퍼서 검지산 가는 산등성에 버리기 시작했다. 유독 진달래꽃이 많이 피던 산에 꽃은 많이 피어 있는데 똥 냄새가 지독했다.
겨울이 문제였다. 똥이 얼자, 똥 퍼가는 사람이 오지 않아 집마다 도끼나 야전삽 또는 곡괭이로 깨트려 산에다 버렸다. 내가 주로 했는데, 옷이며 얼굴이 똥투성이였다. 또 하수도가 없으니 사람들이 사용한 물을 아무 데나 버린 물이 얼어 산 꼭대기에서 내려가기도 올라가기도 어려웠다. 눈이라도 오면 사고가 일어났다. 노인들이 많이 다쳤다. 사람들이 타고 남은 연탄재를 던지기 시작했다.
달동네는 항상 싸우는 소리, 술 먹고 노래하는 소리, 웃는 소리, 그리고 이유 없이 고함지르고, 악을 쓰는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그때 일급 뉴스는 남편이 목숨 걸고 월남에 가서 꼬박꼬박 보낸 돈으로 마누라는 춤바람이 나서 어느 놈팡이와 도망간 사건이다. 귀국해서 집에 오니 집까지 팔아 버린 사건이 실제로 있었던 달동네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관악산과 검지산(산 이름)은 각각 개울을 가지고 있었고 관악산에서 흐르는 개울이 더 컸다.
어릴 적에는 목욕도 하고 가제와 송사리도 잡았고 두꺼비(개 이름)와 물장구치며 놀았던 곳인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모여들자 더러운 시궁창이 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왔을까? 그들도 우리처럼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
내가 집에 오자, 외조모님은 결혼을, 아버지는 신림동 향토예비군 중대장을 하면 어떠냐고 떠보신다. 월급은 얼마 되지 않지만, 과외 수입이 있고 고정 수입이라 괜찮은가 보다고 하신다.
결혼문제는 부모님도 적극적으로 합세하셨다. 박씨 집안의 종손이고 나이도 32살이나 되었으니 너무 늦었다는 말씀이다.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대방동 성당 할머니들이 주축이 되어 중매를 섰다. 영등포에 있는 한의원 집 둘째 딸이었다.
선을 보고 교제를 시작했는데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 집과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다. 영등포 사거리 목 좋은 곳, 삼층 빌딩이 그의 집이었고, 언니와 형부는 명문대 출신이었다. 내가 졸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처가와의 불화가 보이는 것 같아 서다. 그리고 천주교를 믿어야 하고 결혼식도 천주교회에서 해야 한다는 조건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둘째 딸은 나를 죽자 사자 쫓아다녔다. 같이 도망가자고도 했다. 나는 웃었지만,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결혼했다. 마침, 도림동 성당 주임신부님이 해병대 출신이라 결혼식 준비는 급속도로 진행되어 성당은 나중에 다니기로 신부님과 약속하고 신림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후 나는 미국에서 영세를 받았다.)
유일하게 민간인 출신으로 5·16 군사 쿠테타에 참여했던 R 씨의 회사 계열인 K 회사에 입사, 공장 새마을 지도자 선거에 출마 등록을 했다. 선거 연설문을 작성하여 녹음기를 놓고 집사람 앞에서 연설 예행연습을 했다. 얼마 후 노동자들은 나를 당선시켜 주었다.
대전 서구 도마동 새마을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나는 새마을 지도자로서 온 힘을 다했다. 우선, 서울역 뒤 만리동 고개 도로 정화 작업부터 시작했다.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깨어 출근하여 통금 사이렌 직전에 집에 왔다. 사원들과 아침 일찍부터 도로변을 쓸고 닦았다. 휴지를 줍고 쓰레기를 치우고 담배 재떨이 겸 쓰레기통을 설계, 제작하여 거리 곳곳에 설치했다. 사원 복지를 위해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사주와 협의, 개선하는 데 노력하며 효율적인 생산성을 위해 품질관리, 개선, 능률 향상을 위한 아이디어 수집, 우수한 사원의 포상 등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주는 막대한 외화로 독일제 다색 오프셋 인쇄기, 최신 사진식자기, 카메라, 등을 수입해서 인쇄방식의 현대화를 하다 보니 활판 계통에 몸담고 있던 수많은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을 우려해, 노조를 만들 움직임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그들은 나만을 의지했다.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다.
다른 일자리로 대체 해 주기를 원했다. 정부와 사주는 이런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노사협의회라는 것을 만들어 노사협의회 회장은 사장 또는 사주, 노사협의회 부회장은 새마을 실천본부장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감투는 두 개다. 새마을 실천본부장 겸 노사협의회 부회장이다. 어마어마하게 큰 감투다. 쉽게 말하자면 어용 노조 위원장이고, 더 쉽게 말하자면 허수아비라는 말이다.
나는 새마을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노조의 방패막으로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새마을 지도자가 되기 위해 출마했지, 노사협의회 부회장이 되기 위해 출마하지는 안 했다. 그것은 가진 자의 횡포다. 저녁이면 가진 자들은 나를 요정으로 모셔 갔다. 그리고 그들은 치즈 몇 조각, 양주 몇 잔에 내 봉급의 몇 배의 돈을 지급했다.
이것도 강제다.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본부장 차 타시오" 하면 차를 타야 한다. 새마을 운동 지도자가, 달동네에 사는 내가 요정에서 술을 먹다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6월18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어느 낙엽의 시' 4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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