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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공간 서원] <2> 퇴계의 철학 담긴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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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퇴계선생의 고향으로 귀향한지 450년을 맞아 퇴계 귀향길 재현단들이 서울을 출발, 21일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하고 있다. 엄재진 기자
4월 9일 퇴계선생의 고향으로 귀향한지 450년을 맞아 퇴계 귀향길 재현단들이 서울을 출발, 21일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하고 있다. 엄재진 기자

도산서원은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년) 선생의 철학과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인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는 전국에서 현대인들이 몰려와 퇴계의 가르침을 새기고 있다. 퇴계는 지금도 인간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퇴계 귀향길 재현

퇴계 선생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귀향한지 꼭 450년을 맞았다.

퇴계는 1569년 음력 3월 4일 임금의 허락을 얻어 조정을 떠난 지 14일만인 3월 17일 고향 안동 도산에 도착했다.

비록 선생은 도산에 돌아와 1년 9개월 후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원했다. 이를 위해 '나아감보다는 물러남'을 택해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퇴계선생귀향길재현단은 450년 전의 여정에 맞춰 지난 4월 9일부터 21일까지 선생의 귀향길을 오롯이 재현했다.

9일 서울 강남 봉은사를 출발한 재현단은 퇴계의 800리(320㎞) 귀향길을 그대로 따라 걸었다. 다만 충주댐 건설로 수물된 구간 70여㎞는 선박으로 이동했다.

지나는 지역마다 퇴계 시를 읽기도 하고, 그의 철학에 대한 강의도 했다. 영주에서는 초취부인 김해 허씨의 묘소를 참배했고, 이산 서원을 찾아 선생의 자취를 더듬기도 했다.

이근필 퇴계 선생 16대 종손은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소원했고 그것을 사명이라 여겼다. 오늘날 우리도 삶을 항상 되돌아보고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병일 퇴계선생귀향길재현단장(도산서원 원장)은 "퇴계 선생의 최대 염원은 '학문의 완성'이었다. 여기서 학문은 단순히 이론 공부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아가는 올바른 삶의 실천"이라 했다.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전경

◆퇴계의 가르침 '벼슬보다 사람'

퇴계는 임금의 부름을 다시 받아 벼슬길에 나서기전, 1546년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도산서당은 계상서당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뒷산 너머 도산 자락에 지었다. 퇴계는 1557년 57살의 나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해 1560년에 도산서당을 낙성했다. 이듬해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완성했다.

퇴계는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오가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실천 철학을 가르쳤다.

물질 만능과 인간성 상실, 극단적 이기주의 만연 등 지구촌이 앓고 있는 현대사회 병폐 치유의 답을 찾기 위한 지구촌 석학들의 고민은 퇴계의 '경'(敬)에서 멈춘다.

특히 그 속에는 현대사회 리더들이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철학은 물론 청빈과 소박함, 언제나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았던 선비정신·선비의 삶까지 오롯이 스며 있기에 21세기 지구촌 정신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퇴계는 증손자가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숨지자 손자에게 편지를 보내 위로했다. "너라면 어찌했겠느냐?"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이 짧은 이야기 한 소절과 물음에 모든 인문가치, 한국의 정신문화가 담겨 있다.

4월 9일 퇴계선생의 고향으로 귀향한지 450년을 맞아 퇴계 귀향길 재현단들이 서울을 출발해 21일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하고 있다. 엄재진 기자
4월 9일 퇴계선생의 고향으로 귀향한지 450년을 맞아 퇴계 귀향길 재현단들이 서울을 출발해 21일 안동 도산서원에 도착하고 있다. 엄재진 기자

◆퇴계의 실천 '성학의 시작과 끝은 경'

퇴계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엄격한 숙부 밑에서 수학했다. 그는 기묘사화 등을 겪으면서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경'의 실천으로 요약되는 그의 일생은 이처럼 내·외적 삶의 경험에서 축적된 결과물이었다.

이 때문에 퇴계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경'이다. 퇴계가 자신의 학문을 총결산한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경은 성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그의 학문은 경의 정신으로 일관돼 있다.

경은 가르침과 배움의 공간에서만 자리하는 것보다는 생활과 삶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전천후 정신으로 해석되고 있다. 퇴계는 평생을 경의 정신을 실천하는 데 바쳤다.

퇴계의 며느리 가문에 대한 일화는 실천적 '경'의 본보기다. 며느리 집안인 봉화 금씨 가문보다 퇴계 가문은 가난했다. 퇴계는 사돈댁에 갔다가 금씨 문중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이때 분개한 이씨 가문 사람들에게 퇴계는 "사돈댁의 귀한 따님을 며느리로 맞은 터인데, 그런 하찮은 일로 말썽을 일으키면 며느리가 얼굴을 들 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며느리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극진히 대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의 마음에 감동한 며느리 금씨는 죽어서라도 퇴계를 모시고 싶은 마음에 시아버지 묘소 곁에 묻어달라 했다. 맏며느리에 대한 사랑 속에서 퇴계가 행동으로 '경'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퇴계의 교육 방법, '사람됨'

퇴계는 제자들에게 벼슬보다는 사람됨을 가르쳤다. 퇴계가 계상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칠 때 과거에 응시하는 제자가 하나도 없었다.

나라에선 이를 수상히 여겨 다른 사상을 가르치지 않을까 의심해 밤에 감사를 몰래 보내 엿듣게 했다. 하지만 이 감사는 퇴계의 가르침에 스스로 깨우쳐 감사직을 내던지고 제자로 입문했다고 한다.

퇴계 문하에 들어오려는 학생 두 명이 있었다. 퇴계는 학생들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 서당이 아닌 다른 거처에 머물도록 했다.

당시는 여름이어서 한 학생은 갓과 옷을 벗고 목욕했으나 다른 학생은 의관을 갖춘 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저녁에도 목욕을 한 학생은 부채질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고, 의관을 갖춘 학생은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이튿날 퇴계는 목욕을 한 학생은 입문을 허락한 반면 꼿꼿한 학생은 되돌려 보냈다.

퇴계는 "목욕을 한 학생은 꾸밈이 없는 반면 꼿꼿한 학생은 뭔가 감추는 게 많더라"고만 말했다. 세월이 흘러 목욕을 한 학생은 대유학자인 한강 정구 선생이고, 꼿꼿한 학생은 한때 조선의 조정을 뒤흔든 권력자가 됐다.

퇴계의 '사람됨'론은 스스로에게도 엄했다. 조선 명종은 65세의 퇴계에게 전교를 내렸다. 명종과 몸이 편치 않은 퇴계는 수차례 전교와 병든 몸을 놓아달라는 사직의 글을 주고받았다.

결국 명종은 퇴계를 잊지 못해 신하들에게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음'이란 제목의 시를 짓게 하고, 퇴계가 머물고 있는 도산의 풍경을 그려오게 해 병풍을 만들어 두고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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