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하찮은 벌레'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처음에 상대는 권총을 뽑아들고 1파운드를 요구했습니다. 그걸 주니까 또다시 총을 꺼내 들고 2파운드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독재자는 1파운드 17실링 6펜스를 받고서 나머지는 미래에 대한 호의의 약속이라고 둘러댔습니다."

히틀러의 요구대로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합병키로 한 1938년 9월 29일 뮌헨협정 6일 후인 10월 5일 처칠은 영국 하원에서 체임벌린 총리와 히틀러 간의 정상회담을 이렇게 평가했다. 뮌헨 협정과 그에 앞선 9월 15, 16일의 베르히테스가덴 회담, 같은 달 22, 23일 고데스베르크 회담 등 3차례의 정상회담 모두 외교 협상이 아니라 노상강도를 당한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회담에서 체임벌린 총리는 말 그대로 히틀러에 질질 끌려다녔다. 무조건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협상으로 히틀러를 달랠 수 있다는 소망적 사고, 히틀러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며 목적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오판이 결합한 결과였다.

베르히테스가덴 회담에서 체임벌린은 주데텐 독일인들에 대한 자율권 보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자율권 보장에서 주데텐란트의 할양(割讓)으로 문제의 '차원'을 바꿔버렸다. 체임벌린은 회담 시작 2시간 만에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회담도 같은 양상으로 흘러갔다. 고데스베르크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주데텐란트 철수 시한이 10월 1일로 확정됐다. 3차인 뮌헨회담은 할양 지역이 조금 줄어드는 등 약간의 세부 조정이 있었지만, 본질은 2차 회담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 25일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과 관련해 청와대가 "9·19 남북 군사합의에는 탄도미사일 금지 규정이 없다"고 했다. 도발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소리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사일 도발과 그에 이은 김정은의 '겁박'에 함구한 채 "지금까지 남북, 북미 관계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26일 불교계 인사 초청 청와대 오찬)고 했다. 이런 모습이 김정은에게 어떻게 비칠까?

히틀러는 1939년 8월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장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적수들은 하찮은 벌레에 지나지 않아. 난 그들을 뮌헨에서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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