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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비켜주기

손호석 극작가·연출가

손호석 극작가·연출가
손호석 극작가·연출가

'보다'라는 책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소설만 읽고 살아 왔기에 영화 시나리오의 빈 곳을 영상이나 연기로 채워 넣으며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그래서 시나리오는 있어야 할 어떤 필수적인 요소들이 결여된 허술한 구조물처럼 보인다고 써 놓았다. 요컨대 좋은 시나리오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뮤지컬 대본을 읽을 때도 아마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뮤지컬 대본은 기본적으로 공연을 목적으로 쓰게 된다. 그래서 활자로 읽는 것 보다는 최종적으로 무대 위에서 구현될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집필하게 된다. 뮤지컬은 음악과 무용, 미술과 첨단 기술 등이 결합된 종합 예술이어서 대본은 그 모든 요소들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과 같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먹을 수 있는 진수성찬이 잘 담겨진 그릇이 아니라 '여기는 국, 여기는 나물무침을 담아야지' 생각하며 종이에 글자로 음식 이름을 적어 놓은 것 같은 상차림이다. 당연히 아직은 아무런 맛도 없고 보기에도 엉성하며 최종적인 음식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쉽지가 않다.

이건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꽤나 속이 상하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나의 대본 만으로도 충실하고 풍성해서 읽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을 것이다.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여기 저기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아서 나중에 무대에서 어떻게 구체화될지 지금은 감을 못 잡겠어요'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억누르고 음악과 무용, 무대 장치와 연출 기법을 위해 많은 공간을 비워줘야지만 좋은 뮤지컬을 만들 수가 있다. 글로 너무 가득 채워 놓으면 다른 요소들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진다. 역설적이지만 상당히 엉성해 보이는 나쁜 대본이 사실은 좋은 뮤지컬 대본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좋은 뮤지컬 작가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처음 대본은 상당히 허술했는데 작품을 만들면서 여러 사람들이 그 부족한 부분들을 잘 채워서 좋은 작품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럴 때 작가는 조금 속이 상한다. 그러므로 뮤지컬 작가에게는 함께 작업하는 동료들이 존경할만한 사람인지가 무척 중요하다. 그런 관계일 때 모두가 빛나도록 비켜주고 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다. 손호석 극작가·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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