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추억의 요리 산책] 옥수수

옥수수
옥수수

여름이 무장무장 익어갔다. 앞 도랑 건너 줄밤다리 밭에는 소설 속 주인공이 휘두르는, 기다란 칼을 닮은 옥수수 이파리가 무성하게 펄럭였다. 오빠들과 읽은 무협지 속의 수염 짙은 검객이 옥수수밭이랑 사이로 핑핑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꼭꼭 씹으면 단물이 날게다." 아버지는 옥수수의 연한 대를 잘라 낫으로 쓱쓱 껍질을 벗겨내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속살이 아삭아삭 씹혔다. 어머니는 알 고른 옥수수를 골라서 꺾었고, 아버지는 지게 바소쿠리에 옥수수를 가득 담아 줄밤다리 까탈진 밭을 내려갔다. 동네 어귀에는 옥수수를 대량으로 사러 온 상인의 화물트럭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사랑채 가마솥에 옥수수가 푹푹 삶겼다. 감자 간식이 질리기 시작할 무렵에 찾아온 옥수수는 또 다른 별식이었다. 노란 옥수수, 군데군데 점이 박힌 알록이 옥수수, 하얀 찰옥수수가 소금과 사카린을 풀어 넣은 물에 삶겨 간이 알맞게 배었다. 함지박 가득 담긴 옥수수가 바닥을 드러내도록 먹고 또 먹었다.

모깃불에 눈이 따가웠다. 마르지 않은 약쑥에서 나오는 매캐한 연기가 모기를 몰아서 간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의 깔끄러움을 피하려 할머니 치마폭으로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볼록한 배를 문질러주었다. "할미 손은 약손이고 꼬마 배는 똥배여, 술술 내려가라, 술술 내려가라~" '호랑이'와 '두꺼비 신랑' 옛날이야기는 노랫가락처럼 줄줄 외우도록 듣고 들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외가에 들렀다. 개학이 가까워져 오자 큰오빠와 작은오빠는 자전거를 타고 이십여 리 길을 달려서 나를 데리러 왔다. 외할머니는 고추장에 박은 무장아찌를 양은 주전자에 꼭꼭 눌러 담아서 건네주었다. 자전거 앞자리에 앉아서 한 방향으로 다리를 모았다. 비탈길에 자전거가 덜컹거리자 내 손에 힘이 쏠렸다. 자전거핸들이 마구 휘청거렸다. 큰오빠는 도저히 갈 수가 없다며 다시 자리 배정에 나섰고, 뒷좌석으로 밀려난 나는 장아찌 담긴 주전자를 들어야 했다.

울퉁불퉁 산비탈을 지나고 큰길로 들어서자 큰오빠는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앵무동 초입의 너른 밭에서 옥수수 꺾는 어른들 목소리가 두런두런 스쳤다.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순간적으로 무언가에 걸려 자전거는 튀어 올랐고 나도 튀어 올랐다. 분명한 것은 주전자는 꽉 쥐고 있었는데 오빠의 옷자락을 놓쳐 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방에 누워 있었다. 오빠들은 막냇동생이 길바닥에 떨어진 줄도 모른 채 곧장 달렸고 옥수수를 꺾던 동네 어른들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나를 챙겼단다. 찌그러진 주전자에서 쏟아진 고추장으로 범벅이 된 '노 씨네 막내딸'이 큰 사고를 당했다고 동네가 술렁거렸다. 자전거 사고로 앞니가 몇 개 빠진 나는 그 좋아하던 옥수수를 먹지 못했다.

옥수수를 심었던 줄밤다리 화전(火田)은 낙엽송 숲에 잠들어 이제 흔적조차 희미하다. 그 줄밤다리 옆 골짜기에는 할아버님이, 맞은편 능선에는 할머님과 아버님이 나란히 누워 계신다.

옥수수를 삶았다. 소금 한 꼬집 넣고 단맛을 추가한다. 찰옥수수를 꼭꼭 씹을수록 유년의 맛이 난다. 옥수수의 계절은 또 이렇게 사위어 간다.

노정희 요리연구가
노정희 요리연구가

Tip: 옥수수는 치아와 눈 건강에 도움을 주며 변비 해소에도 효과가 있다. 옥수수수염을 끓여 차로 마시면 이뇨 성분뿐만 아니라 혈액순환에도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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