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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부] 조국이 만든 패륜아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1702년 12월 14일 46인의 낭인(浪人)이 억울하게 할복을 강요당한 주군(主君)의 원수를 처단한 이른바 '추신구라(忠臣藏) 사건'은 당시 도쿠가와 츠나요시(德川綱吉) 막부(幕府)에 큰 충격을 줬다. 우선 막부 체제의 기반인 주군과 가신(家臣)이라는 주종 관계와 일본 전체를 규율하는 법률의 충돌이기 때문이었다.

일본 지배층의 여론은 처음에는 동정적이었다. 그 요점은 주군에 대한 가신의 충성이 일본 전통이고 도쿠가와 막부가 통치 이념으로 중시해 온 유교 윤리 즉 군신 간의 공적 윤리와 가족 친구 간의 사적 윤리를 나란히 세우는 윤리 체계에도 부합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한 유학자가 공적 윤리와 사적 도덕은 같을 수 없다고 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이다. 그는 이 사건의 처리 방법에 대한 막부의 자문 요청에 응한 '소라이의율서'(徂徠擬律書)에서 낭인들은 할복해야 한다고 했다.

"의리는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길이며 법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따라야 하는 기준이다. 46인의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위해 원수를 갚은 것은… 의롭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 무리(黨)에 한정되는 일이므로 궁극적으로 사적(私的)인 논의일 뿐이다.… 사사로운 논의를 가지고 공정한 논의를 해친다면 앞으로 천하의 법도가 서지 않게 될 것이다." 개인 도덕을 공무의 장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공적 윤리를 사적 도덕 위에 놓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가치의 경중(輕重)이나 우열(優劣)이 있는 게 아니라 영역이 다른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처결 방법으로 할복을 제시한 것은 이 때문이다. 주군에 대한 충성이란 사적 윤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타협이었다. 막부는 소라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조국 법무부장관이 자택 압수수색을 지휘하는 검사에게 전화로 "신속하게 해달라"고 한 것을 두고 '수사 외압'이란 비판이 일고 있다. 전화한 것 자체도 문제지만 비판 여론에 대해 "인륜의 문제"라고 한 것은 더 문제다. 사적 윤리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나저나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딱하게 됐다. '패륜아'가 되게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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