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흙떡' 맞은 삶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시주하고 흙떡을 맞다.'

1902년 18세에 결혼해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1907년 23세 때 군대 해산, 이듬해 의병으로 싸우다 잡혀 종신형으로 옥에 갇혔다. 1910년 26세에 나라가 망하자 오히려 풀려났다. 다시 1913년 29세에 독립운동을 하며 비밀결사 참여와 친일파 처단, 독립자금 마련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 1921년 37세에 또다시 잡혀 사형 구형, 무기징역 선고, 감형으로 1937년 53세에 풀려나자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1945년 61세, 환갑 지나 해방됐지만 너무 많이 잃었다. 의병 투쟁 중 아내를 여의고, 다시 만난 아내마저도 무기징역 옥살이에 1남 1녀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떴다. 불행은 이어졌다. 가정은 비록 다시 꾸렸지만 투옥으로 제대로 살피지 못한 딸과 아들이 폐결핵으로 차례로 곁을 떠났으니 말이다.

게다가 광복은 됐지만 옛 동지들과 재건한 독립운동단체가 곧바로 해산당했다. 6·25전쟁 전후에는 사회주의자로 몰려 가족과 헤어져 도망다녀야 했다. 이미 민족 지도자 여운형·김구 같은 인물의 암살에서처럼 친일 세력의 보복이 일제만큼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그에게, 되찾은 조국의 분위기는 '독립운동가의 삶이 시주하고 흙떡을 맞은 격'이었다. 일제에 맞서 버티던 그였지만, 1955년 71세가 되자 그런 세월을 견딜 수 없었던지, 남은 삶의 짧음을 느껴선지,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옛일을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뒀다.

되찾은 나라에서 맛본 배신과 표변(豹變)의 사회를 살아갈 아들이 눈에 밟힌 듯 그가 되풀이한 이야기는 믿음이다. 그래서 그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말씀은 '친구는 죽음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들이 자라 아버지 유훈을 새겨 지금도 간직하는 까닭이다.

"얼굴을 아는 사람이 온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사람과 잘 사귀는 데는 신의(信義)가 제일이니라."

그는 독립운동가 우재룡으로,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 지휘장이다. 그를 기려 아들(우대현)이 최근 '대한광복회 우재룡'을 펴냈다. 3·1운동 100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대한광복회 결성지 대구에서 발간됐으니 반기고 축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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