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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가르치는 봉사로 나이를 잊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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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환(90) 일본어 강사

은퇴 후 65세 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해 20년째 일본어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오명환(90) 옹(翁). 일본어 강의 무료 봉사는 그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비법이다. 석민 선임기자
은퇴 후 65세 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해 20년째 일본어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오명환(90) 옹(翁). 일본어 강의 무료 봉사는 그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는 비법이다. 석민 선임기자

오명환(90) 옹(翁)은 요즘도 하루 하루가 새롭다. 가벼운 동네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아직까지 병원을 찾을 만큼 아픈 곳이 없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 옹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만드는 것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어 강의 제자들이다. 일본어 무료 강의를 시작한 지도 어느듯 20년 세월이 흘렀다.

"이 나이에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또 제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지 모르겠습니다. 강의 준비 이외에 틈이 날 때에는 일본 소설이나 영화, 역사 공부를 합니다. 취미생활인 셈이죠. 그밖의 대외활동은 아주 최소한 만 합니다. 친구도 별로 없어요. 어렵고 힘든 시기와 6.25 전쟁을 청소년기에 겪었던 탓에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었습니다."

여유롭고 행복한 노후를 위해 경제력이 탄탄하고 친구가 많아야 한다는 편견을 오 옹은 깨트린다. 두 부부의 기초노령연금과 참전용사 수당 등 한 달 생활비가 100만원에도 못미치지만 부족함이 없다는 설명이다.

▶ "무의미한 노후, 이건 아니다!"

오 옹은 6.25학도병 출신이다. 영남중 5학년(당시 중·고통합) 때인 1950년 8월 31일 학도병으로 입대해 영천안강전투 등에 참전했고,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나면 다시 복학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은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불확실성은 갑종장교 후보생으로 지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장교임관 후 1년이 지나자 휴전이 이루어졌고, "이제 전역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변수는 또 생겼다. 1954년 미국 오클라호마 포병학교 기간장교 연수 대상자로 선발된 것이다. 보통학교 졸업 후 장티푸스로 중학교 진학이 한 해 늦어지면서, 희도국민학교에 개설된 무료 영어강의를 열심히 들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해외연수를 마친 뒤 의무복무 기간이 다시 5년 더 늘어났고, 이렇게 전역은 1965년 3월까지 늦어졌다.

오 옹은 전역 후 군무원(K-2, 5관구) 생활과 TV 브라운관 재생 및 판매업을 거쳐, 1994년 65세 때 은퇴하기 전까지 부동산중개업에 종사했다.

"나름 열심히 살았고, 이제는 은퇴해 좀 쉴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두류공원과 앞산공원 등을 다녔는데, 속된 표현으로 빈둥거리는 노인뿐이었습니다. 일부는 100원짜리 고스톱 판을 놓고 옥신각신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건 아니다!'며 한 달 만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이 때 오 옹은 대구중앙도서관에서 무료 일본어 강좌를 개설한다는 홍보물을 발견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일본어가 익숙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공짜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아마 그 때 무료 영어강좌가 개설되었더라면 지금 영어강사가 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미국 포병학교 유학경험까지 있어 일본어 보다는 영어가 더 친근했다.

오명환 옹과 제자들이 KT칠곡지사 내 커피숍 매장에서 일본어를 배우는 모습.
오명환 옹과 제자들이 KT칠곡지사 내 커피숍 매장에서 일본어를 배우는 모습.

▶ "배워서 남주자"


"일본어 강좌 홍보물을 보고, 이걸로 새 인생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오 옹은 3개월 일본어 초급 과정을 2번이나 수강했다. 그리고 계명대 국제교육원을 찾아갔다. 담당교수를 설득해 어린(?) 대학생들과 6개월 중급과정을 함께 들었다. 처음엔 조금 딸리는 듯 했지만 3개월이 지나면서 대학생의 실력을 앞질렀다.

"중급과정 수료 후 지도교수가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다면서 일본어 1급 자격 시험에 응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4, 3, 2급을 모두 뛰어넘고 단번에 일본어 1급 자격증을 얻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오 옹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95년 경북대 일어일문과에 명예학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과정을 마친 오 옹의 일본어 실력은 상당한 수준급이 되었다. 당시 명예학생제도를 도입했던 박찬석 경북대총장의 한 마디는 폐부를 찔렀다. "대학에서 배운 것을 헛되이 하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시기 바랍니다."

오 옹은 봉사의 길을 스스로 찾았다.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지인의 소개로 신암교회에서 주 2회 일본어 강의(중·고생)를 했고, 월드컵과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대구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직접 대구시공무원교육원을 찾아갔다. 장소만 무료로 빌려주면 수강생을 직접 모집해 무료로 일본어 강의를 하겠다고 설득했다. 국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선 외국어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하니 교육원 측에서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4년 간 80여 명의 제자를 키웠고, 이중 5명이 일본어 1급 자격증을 획득했다.

일본어 강의 봉사는 이어졌다. 남구 대명동에서 북구 칠곡으로 이사를 간 뒤에는 1년 간 동아문화센터에서 강의를 맡았다. 20년 일본어 강의 기간 중 유일하게 유급 강의를 한 시기이다. 2012년부터는 KT칠곡지사의 도움으로 칠곡주민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 무료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주로 주부들과 은퇴한 남성이 수강생의 주류를 이룬다.

오 옹은 "젊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배우고 가르치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르겠다. 아픈 곳도 없고, 마음이 넉넉하니 내가 진짜 부자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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