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이 편한 세상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서 우연히 스텝회의가 약속되었다. 이동 경로와 위치를 고려하다보니 반가운 우연과 마주하게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시간이 남아 30년 가까이 된 기억을 더듬어 살던 곳을 찾았다. 나지막한 2층 주택을 개조해서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다세대 주택이었는데, 부엌과 욕실은 신발을 신고 가야하는 불편한 구조였다. 하지만 기억 속의 2층집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외벽이 대리석으로 된 높은 빌라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전 몇 개를 손에 꼭 쥐고 달려가 불량식품을 사먹던 구멍가게도, 늘 기름 냄새를 풍기던 인쇄소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작은 양말 공장도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엔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사각형의 빌라가 들어섰다. 축구공을 옆에 메고 벽돌담 위로 고개를 쭈욱 뺀 채 "누구야 놀자" 라고 외치던 그 시절 친구 집도 사라졌다. 네모난 인도블록으로 좁고 울퉁불퉁했던 골목길은 빌라의 그림자 때문인지, 매끈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때문인지 더 어두워 보였다. 바닥에 선을 그어 땅따먹기를 하던 공터는 이편한세상 아파트 단지의 입구가 되었다. 차량 몇 대가 입구에 있는 바리게이트 앞에 서자 차단기가 열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유를 설명하긴 힘든 서글픔이 몰려왔다.

우리는 참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면 친구를 불러낼 수 있고 전화번호도 외울 필요가 없다. 비밀번호 몇 자리를 누르면 투명한 자동문이 열리는 대문, 등록된 차량번호를 인식하고 자동으로 차단기를 열어 반겨주는 아파트 입구, 지인의 생일선물은 기프티콘으로 보내고 내비게이션 하나면 지도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다. 친구를 불러내기 위해 목청을 높이다가 친구 부모님과 인사할 일도 없을 것이고 유선전화로 친구 집에 전화할 일도 없을 테니 전화예절도 필요 없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힘들게 맞춰 넣을 필요도 없고 삐걱거리는 대문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다. 지인의 생일선물을 포장할 일도 없고 차를 타고가다 길을 잃어 지나는 행인에게 머쓱한 인사를 건넬 필요도 없다. 우리는 참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

편한 세상이 될수록 사람의 능력은 저하되고 사람간의 교감은 기계가 대신 한다. 눈빛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높낮이가 있는 음성은 텍스트가 대신한다. 그 시절 대문을 두드리며 음식을 나눠먹던 이웃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는 만큼 이 편한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깊어진다.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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