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사과를 먹고도 사과하지 않는 계절

임창아 시인·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사과의 계절이 왔습니다. 사과를 먹고도 해야 할 사과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지 않은 사과를 빨강이라고 둥글다고도 할 수 있지만, 단맛이라고 신맛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값이 싸다고 비싸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냥 사과였으면, 사과여야 합니다. 의미로 분류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먹는 것이 사과였으면, 아침이면 의무적으로 사과가 먹고 싶어집니다. 사과를 먹지 않으면 시작될 것 같지 않은 하루.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는 이브의 사과요, 둘째는 뉴턴의 사과요, 셋째는 세잔의 사과다.' 프랑스 상징주의 드니의 말입니다. 이브의 사과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고, 뉴턴의 사과로부터 근대과학이 시작되었고, 세잔의 사과로부터 현대미술의 꽃이 피었습니다. 세 사과는 각각 자연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인간 감성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평생 사과를 바라보며 질문했던 세잔은 바구니 속 사과를 백번 이상 그렸다고 합니다. 드니는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은 먹고 싶지만, 세잔이 그린 사과에게는 말 걸고 싶어진다"고 하였지요. 말 걸고 싶어진다니! 없는 입으로 말하는 사과를 상상해 봅니다. 그러니까 세잔이 그리 오랜 시간 골몰한 것은 한 알의 사과를 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과의 모든 것을 화폭에 담기 위함이었겠지요.

'어디쯤에서 잘못한 일로 발갛게 익어 가는/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사과해야 할 일들과 사과 받을 주소들이 많다 (…)잘못한 일이 많아서 풍년이 들었다는 사과가/ 북상 중이라는데/ 부담 없게 사과할 때는 한 상자를/ 해묵은 사과를 할 때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식목일 전에 보내는 것도 좋은 사과지만/ 추신으로 단맛을 적어 보내면 더 좋은 사과' 이담하 시인의 시 '사과는 용서받을 때까지' 일부입니다.

주먹을 꽉 쥐고도 사과나무는 펀치를 날리지 않습니다. 사과나무에 앉은 사과가 자꾸만 붉어지기 때문입니다. 사과에게도 하지 못한 사과가 있을까요? 단맛을 '추신'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꽃을 버린 기억으로 스스로 붉어진다는데, 꽃에 대한 사과의 마음에서 비롯된 걸까요? 해질 무렵 사과나무에 걸터앉은 하늘도 더불어 붉게 물듭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의미의 사과와 사과나무 열매를 뜻하는 사과는 시의 마지막에서 하나가 됩니다. 사과하고 싶다면 '용서받을 때까지 늦가을 사과나무처럼 서 있어야 한다'고.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들이 사과를 더 붉게 하고, 붉은 사과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사과나무를 어루만지고, 그리하여 물어볼 수 없었거나 대답하지 못했던 사과가 있다면, 물어보기 전에 대답을 마련하고, 대답하지 않아도 사과는 그냥 사과였으면 좋겠습니다.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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