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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세상 읽기] 우리들의 소울 송

이미자
이미자 '저 강은 알고 있다' 매일신문 DB
전경옥 언론인
전경옥 언론인

지난해부터 가열된 트롯(trot) 가요 열풍이 가히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연히 TV의 트롯 경연 프로를 접한 뒤로 나 또한 속절없이 그 속으로 휘말려드는 참이다. 시도때도 없이 트롯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된다. CD도 몇 개나 구입했다. 오래간만에 조우했음에도 세월의 간격이 느껴지지 않고 여전히 정겹기만한 옛동무같은 느낌이랄까.

선풍적인 트롯 인기는 아스라한 옛 기억들도 불러낸다. 중학 1,2학년때쯤 집에 처음으로 라디오가 생겼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그 시절, 직육면체의 작은 상자는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열심히 땀 흘리던 서민들에게 살가운 그 무엇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주었고,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실감나게 펼쳐지던 연속극은 일상의 즐거움이자 화젯거리였다.

유행가에 얽힌 기억의 편린들도 모자이크처럼 떠오른다. 사춘기의 우리 또래들은 이따금 함께 모여 어른들의 노래인 유행가를 몰래 불러보곤 했다. 내 생애 첫 유행가는 이미자의 '저 강은 알고 있다' 였다. 젖살 덜 빠진 단발머리 소녀가 "~한많은 반평생에 눈보라를 안고서 모질게 살아가는 이 내 심정을 저 강은 알고 있다" 라는 한맺힌 노래를 의미도 모른채 불러댔으니….

그러고보니 '노래자랑 대회'도 있었다. 그 무렵 내가 살았던 면(面) 소재지에서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노래자랑 경연대회가 열리곤 했다. 장터에 가설무대가 만들어지고 노란 알전구가 불을 밝히면 삼삼오오 초저녁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무대 주변에 모여들었다. 대다수는 한창 가슴 달뜬 청춘남녀들이었고, 여드름쟁이 십대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벤처스악단
벤처스악단

마을의 양조장집 오빠가 시골서는 보기드문 드럼을 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경이에 찬 눈빛을 보냈다. 또 아마추어 기타리스트가 '당당당 당 다앙 다앙~' 하며 신명나게 트위스트 리듬을 연주하면 무대 위아래 관객들은 팔다리를 움찔거리며 흥겨워했다. 훗날 알았지만 1960년대 전세계를 휩쓸었던 미국 벤처스 악단의 빅히트곡 '상하이 트위스트' 였다. 마이크를 잡은 동네 가수들의 노래와 춤이 끝날 때마다 터지는 박수소리와 휘파람 소리…. 밤이 이슥하도록 요란벅적했지만 마을의 그 누구도 시끄럽다며 삿대질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가설무대의 불빛이 꺼지고 모두가 돌아간 뒤에도 노랫소리는 여진(餘震)처럼 남아 밤새껏 귓가에 맴돌았다. 문주란의 '동숙의 노래', 한명숙의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오기택의 '고향무정'….

그렇게 친숙해진 나와 트롯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 사이가 벌어졌다. 노랫말이란게 온통 뻔한 사랑타령에 눈물, 이별, 고향타령 뿐인데다 멜랑콜리한 곡조 또한 사람 마음을 스멀스멀 염세적으로 물들인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트롯은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불꽃 튀는 트롯 경연대회를 다시금 접하면서 트롯의 진화를 느끼게 됐다. 형식만 해도 전통적인 엘레지를 비롯해 발라드풍, 댄스풍, 국악풍, 락(rock)풍에 힙합 스타일까지 스펙트럼이 한결 다채로워졌다. 애조(哀調) 띤 노래 일색이던 과거와 달리 밝고 서정적이고 흥 넘치는 멜로디에 시(詩)적이고 심지어 철학적인 가사들도 적지 않다. 아기같은 얼굴의 초등생부터 20대 전후의 말끔한 청년세대까지 트롯 애호층이 부쩍 확장된 것도 놀랄만하다. 이참에 '슬픈 노래'에 대한 나의 편견도 교정했다. 슬픈 영화를 보고 한바탕 눈물 흘린 뒤의 개운함처럼 애달픈 가사와 곡조의 트롯에도 그런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KBS
'국민 막걸리 완판남'으로 등극한 경북 안동출신 가수 영탁이 '미스터트롯' 진의 영예를 안았다. 방송 캡쳐

한국의 트롯처럼 세계 각국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대중음악들이 있다. 프랑스의 샹송이나 이탈리아의 '칸초네', 포르투갈의 '파두(fado)', 그리고 일본의 '엔카'와 중국의 '민꺼(民歌)' 등등. 모두가 제각각 민족 특유의 체취나 서정이 깊숙이 배어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네 트롯이 좀 더 독특한 색채를 지니고 있지 않나 싶다. 일본의 '엔카'와는 원조를 따질만큼 비슷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엔카'가 대개 항구, 술, 눈물, 여자, 비, 눈(雪) 등 애상(哀傷)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틀에 박힌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비해 우리 트롯은 훨씬 그 폭이 넓고 활달하고 자유롭다. 게다가 트롯 노래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특유의 꺾기 창법은 그 어떤 나라와도 차별화되는 필살기라 할만하다.

한국인의 애창곡 순위에는 예외없이 대중가요가 상위 순번에 오른다. 높은 사회적 지위의 고관들도, 으리으리한 부자들도, 유명짜한 셀럽들도 마음 편한 자리에서는 트롯을 부른다. 확실히 트롯이야말로 우리 한국인의 '소울 송(soul song)'인 것 같다.

KBS '가요무대'에 출연한 로미나. 방송 캡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마침내 아카데미상을 휩쓸면서 변방의 한국영화가 난공불락의 장벽을 시원스레 허무는 쾌거를 이루었다. 세계 팝뮤직계에 돌풍을 몰고 다니는 방탄소년단(BTS)과 K팝, 해외 여성들을 사로잡는 K뷰티, 건강식의 다크호스 K푸드에 이어 바야흐로 K무비가 지구촌을 열광시키고 있다. 한국문화의 파워가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한국산 트롯이 세계인들을 매료시킬 날도 오지 않으려나. 금발의 독일 출신 트롯 가수 로미나가 이미자의 '울어라 열풍아'를 감정에 몰입돼 부르는 모습을 보니 문득 그런 기대감을 갖게 된다. 마침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날로 급증하는 추세 아닌가. 피부색도, 눈동자색도 다른 지구촌 남녀들이 '메이드 바이 코리아(made by Korea)' 트롯을 꺾기 창법을 구사해가며 한국말로 멋들어지게 부르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전경옥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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