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졸업했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은지가 8년이 되었다. 기획이라는 분야에 더 전문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림을 그리면 취향이 생길 것이고, 그 취향에 맞춰 예술을 재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취향이 명확히 나눠지는 것도 아니며, 취향에만 집중하여 기획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스스로가 만들게 될 위험요소를 차단하기 위해 이러한 다짐을 하였다.
붓을 놓고 난 뒤, 현재까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적이 없다. 아니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생활 반경을 최소화하다 보니 계획한 일들을 진행할 수 없는 데다, 집에만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코로나19에 대처하여 자발적 자가격리를 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이 지루해지기 시작하며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운 뉴스들과 개인적 상황은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냈다.
'작품을 제작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아닌, 단순히 이 상황과 지금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간 가둬뒀던 욕구가 나타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러한 미술적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혹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아기 때 휘젓던 그림 아닌 그림(난화)이 그런 것이겠다. 하지만 말을 하게 되고 문자를 읽게 되면서 그리게 된 그림은 대상이 명료해졌으며, 잘함과 못함으로 구분되어졌다. 그리고 '잘함'이라는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잘 그리기만 할 뿐 그림은 더 식상해져갔다. 어쩌면 미술을 전공을 하게 되면서 즐기려는 마음이 사라졌던 것 같다.
미술은 20세기로 접어들며, '잘함'과 '못함'의 구분이 해체되었다. 누구나 미술을 즐길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종의 놀이로써의 역할을 제안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술에는 엘리트주의가 깔려있다. 미술은 감상에 있어 아무런 지식 없이도 향유할 수 있지만 미술사, 미학 등의 내용과 작가의 개별적 이야기까지 알고 있다면 미술을 한층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엘리트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제작의 영역에서 엘리트주의는 분명 반감된다. 여기에 더해 '미술', '예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우라를 배제한다면 엘리트주의는 사라지고, 순수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눈치 보지 않고 지금 눈에 들어오거나 생각나는 것들을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이 표출하게 될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요즘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지는 상황이라면 한 번쯤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누구에게 보여줄 그림이 아니기에 못 그린다고 겁낼 필요도 없다.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과 마주하게 되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박천 /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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