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닫혀 있던 여행객들의 지갑이 5월을 들어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단체여행은 기지개를 펴지 못했지만 개별여행은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여행을 포함한 외부활동을 자제한 데에 따른 '보상 소비' 심리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코로나로 쌓인 피로와 긴장을 풀기 위해 전남 청산도로 떠난다.
◆ 느린 풍경으로 삶의 쉼표가 있는 청산도
푸른 바다와 다도해의 섬들, 돌담길과 이어지는 삶의 사연들은 청산도를 단장하는 주요 매개들이다. 청산도의 풍경들은 봄날 실바람처럼 여유로운 템포로 흘러간다. 청산도는 전남 완도군 청산면에 딸린 섬으로 사시사철 푸르다고 해서 '청산도'(靑山島)라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신선이 산다는 섬이라 해서 '선산도' 또는 '선원도'라 불렀다. 또한 '느린섬 여행학교'라는 공립 숙식 힐링 센터가 있어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이기도 하다. 뱃길로는 완도 항에서 40~50여분, 배시간은 1시간 30분 간격이었다.

대구에서 4시간여를 달려 완도 항에 도착한 일행은 차량에 대한 의견이 있었지만 배에 싣기로 결정했다. 남해안 대부분의 섬이 차량이 필요치 않았기에 설왕설래 했지만 청산도의 해안선이 42Km인 점을 감안한다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는 곧바로 섬 관광에 나섰다. 맨 먼저 찾은 곳은 서편제 촬영지로 소나무 몇 그루가 버티고 선 언덕배기에 올라서자 도청항과 아기자기한 어촌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청보리가 바람을 타는 듯 곤드레나물이 술기운을 빌어 춤을 추는 듯 푸름이 가득한 들판을 보고 있노라니 세파에 찌든 때가 씻기듯 마음까지 푸름에 녹아드는 기분이다. 문득 서편제의 장면 장면이 퍼즐이 맞춰지듯 선명하게 떠온다.
집착으로 변한 사랑으로 인해 눈이 먼 송화, 사랑을 소유로 착각하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유봉, 유봉의 끼를 이어 받은 동호가 북채를 잡고는 시공간을 넘는다. 어깨는 얼~쑤, 허리는 절~쑤, 엉덩이는 덩~더쿵 거방지게 어우러져 한판 춤사위를 펼친다. 가슴 속에 앙금처럼 남아있는 한을 몽땅 풀어내려는가 보다. 몸뚱어리는 팽그르르 자반을 뒤집고, 막대기 위의 버너처럼 전립 위의 패영을 옹골차게 거머쥔 상모는 눈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꽹과리는 캐~갱갱, 북은 둥둥, 소고가 후드득거려 훌쩍이는 눈물을 보는 듯하다.

◆느림의 미학
청(靑), 푸름에 녹아들어 탐진치(貪瞋癡: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를 떨쳐내자 한 마리 새가 된 기분이다. 이렇게 한갓지고 유유자적한 날을 생에 몇 번이나 누릴까? 여행이 주는 여유로움이 달콤하여 눈을 들자 흰 구름 몇 조각이 둥실 뜬 하늘은 에메랄드빛을 무한정 쏟아내고 그 빛을 고스란히 품은 푸른 들녘이 눈이 비좁도록 들어와 싱그럽다.
상상속의 여운이 남아 희미하게 들리는 듯 가물거리는 노랫가락을 찾아 귀를 쫑긋 세운 채 걷기 시작했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길이건만 섬의 이미지에 걸맞게 당락리 쪽을 거슬러 느림의 미학을 체험중인 것이다.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길섶에선 온갖 풀들이 두런두런하고 산비장이가 그간 머금은 태양을 토해내듯 송이송이 빨갛게 도드라진다. 소의 잔등처럼 휘어진 농로는 어린 날의 일기장을 소환하기에 충분했다.
아버지께서 똥장군을 지고 가던 길, 해설픈 저녁나절 송아지가 어미 소를 따르고 단발머리소녀가 소 이타리(고삐의 방언)를 검어 쥐고 걷던 길,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나비가 길 앞잡이를 자처하고 띄엄띄엄 차량이 다니는 바퀴자국으로 막 돋아나는 잡초가 무딘 바리캉이 지난 것처럼 엄벙덤벙 귀여웠다. 얼마를 걸었을까? 자라목부근에서 해변으로 난 비렁(벼랑길)길을 택했다.
그 누군가는 말했다. 바람에 등을 떠밀린 파도소리는 억겁의 세월 속에서 늘 같은 듯 들리지만 하모니, 멜로디, 음절하나 같은 것이 없다고! 어디 들어 보란 듯 파도는 연신 발밑에서 울었고 몽돌을 만나 하얗게 부서져 귓전으로 '차르르'쏟아지자 밤하늘에 오종종한 별들의 속삭임을 엿듣는 듯했다.

◆신선의 뜻을 어긴 애기범의 전설이 서린 범바위
다음날 이른 새벽, 차를 몰아 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를 달렸다. 일몰의 아쉬움을 달래려 일출 포인트를 찾아가는 중이다. 화등잔만한 전조등이 길을 밝힌다지만 끈적이는 어둠 속의 초행길은 늘 두려움을 동반한다. "어제 예습이라도 할 걸" 만시지탄으로 차를 모는 중에 바다 쪽으로 난 길이 보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성산포로 가는 길이었다. 민박집 주인은 진산해변을 추천했지만 들을 때는 다 아는 것처럼 "예~예~"하다가 몽땅 잊어버리곤 엉뚱한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고 세운 뜻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기대에는 못 미쳐 자그마한 섬과 이내 속을 탁구공처럼 '톡' 튀어 오른 동그란 태양을 그리는 걸로 만족했다.
아침은 도청항에서 해결했다. 청산도는 의외로 큰 섬이라 끼니걱정은 없었다. 아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벽에 달린 길을 되짚어 처음 찾은 곳은 칼바위(범바위)전망대다. 고개를 넘어 안내판에 따라 접어든 길은 시멘트로 포장을 했다지만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다. 간간이 교행이 가능한 장소를 만들었지만 가는 내내 다른 차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범바위는 신선의 뜻을 어긴 애기범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30분이면 충분히 둘러 볼 수 있는 곳으로 바다와 어우러진 한때의 돌무더기가 부처님의 나발을 닮은 듯 보였으며 수평선과 파란하늘이 조화를 이룬 이색적인 관광지였다.

◆청산도의 구들장 논,청보리와 어울린 4~5월이 적기
청산도하면 구들장 논으로 꼭 한번은 보고 싶었다. 남해의 작은 섬에서의 논은 이례적으로 섬 처녀는 시집 갈 때까지 쌀 한말을 못 먹는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현재의 쌀은 주식이란 자리도 위태롭지만 과거에는 재물의 기준이 될 만큼 귀했다. 그렇다고 모 한포기 꽂을 데가 어디 있었을까?
언뜻 보기에는 다랑이 논을 닮았지만 애면글면 돌을 모으고 한 땀 한 땀 시침을 하듯 정성으로 지낸 세월의 수고로움은 비교 대상이 아니란다. 그래서일까 16~17세기 무렵 만들어진 구들장 논은 2013년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로 지정되고 2014년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서 주관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된다.

구들장 논에서 5분여 거리에 있는 돌담마을은 팔공산 한티재 너머에 있는 대율(한밤)리 마을을 연상케 했으며 규모는 훨씬 작아보였다. 돌담으로 길게 이어진 길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한적했다.
새목다리를 가는 중에 왼쪽 편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신흥해수욕장, 들판 같은 해수욕장을 가득 메운 파도가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켜켜이 부서지는 모습이 가슴이 시린 정도로 아름다웠다.
청산도 관광은 이랑마다 훤칠한 유채가 노랗게 흐드러지고 청보리가 새파랗게 독이 오르는 4~5월이 성수기다. 후일 시기에 맞추어 다시 찾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다. 차가 꼭 필요한 섬이지만 무한정 사람이 몰리는 그때도 도로사정이 괜찮아 마음대로 다닐지는 의문이다.

글 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취재6부장 lwonss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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