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예술, 나의 삶] 구상화가 김건예

넓은 붓으로 밑칠 오묘한 색감 살려

'갈필효과 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 김건예는 기법의 특성상 캔버스를 벽에 걸어놓고 서서 작업하는 시간이 많다.
'갈필효과 기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 김건예는 기법의 특성상 캔버스를 벽에 걸어놓고 서서 작업하는 시간이 많다.
김건예 작 '샘'
김건예 작 '샘'

'물랭 루즈에서, 춤'(1890년)으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은 귀족의 혈통과 재산,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았지만, 한편 가계의 유전적 결함도 함께 물려받음으로 해서 10대 중반에 넘어져 허벅지 뼈가 부러진 뒤로 키가 거의 자라지 않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평생에 걸쳐 카바레, 뮤직홀, 사창가 등 파리의 밤 문화 속에서 '인물화'에 집중한 화가로 색과 표현에서 자유로움을 구사해 명성을 떨쳤다.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은 주지하다시피 신조형주의라는 양식을 통해 자연의 재현적 요소를 제거하고 보편적 리얼리티를 구현하고자 했다.

"로트렉의 그림은 대학 때부터 무척 좋아했던 작품들이었고, 독일 레지던시 시절 한 뮤지엄에서 만난 몬드리안의 작품은 나로 하여금 30여분 정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적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냥 화첩에서 보던 도록의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죠."

로트렉과 몬드리안을 좋아하는 구상계열 현대미술가 김건예(52)는 화가로서 비록 두 사람의 화풍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로트렉의 자유로운 인물표현법과 몬드리안의 색만을 이용한 차가운 추상성과 미니멀적인 요소는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내재적 미술재능과 부합하는 점이 적지 않다고 고백했다.

대구시 동구 율하동로 주택가 2층은 김건예가 2년째 사용하는 작업공간으로 방 한 칸엔 그녀의 작품들로 가득 차 있어 새로운 창작공간을 모색하고 있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전신인 효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87학번) 서양화과를 나온 작가는 2009년 봉산문화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시기 김건예의 화풍은 초기의 '갈필효과 기법'으로 인해 화면 속 회화적 표현, 즉 인물이나 풍경의 실체가 선명하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갈필효과 기법'이란 주걱이 넓은 붓을 이용해 캔버스 화면을 가로 또는 세로로 밑칠을 먼저 하는 방법으로 계속 색이 올라감에 따라 화면 전체가 마치 모시 천 같은 시각적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때 바탕에 색을 올리는 횟수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5, 6회의 색을 연속적으로 칠하게 되면 이후에 중복된 색감이 화면 위로 올라오면서 오묘한 느낌의 색감을 만들어 내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칠해진 갈필 효과적 화면 위에 자신이 의도하는 여러 조형언어들을 다시 재현해냈었다.

"사실 저는 고향 성주에서 초교시절부터 만화를 잘 그렸어요. 또래 아이들 중 그때 노트 맨 앞장에 제 만화그림 한두 점 없었던 아이가 없었죠."

중'고 때는 재능을 살려 미술부에 들어갔으나 만화와 본격적인 그림 수업은 달랐다. 이미 친구들의 실력은 김건예의 만화적 솜씨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녀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방과후 더 열심히 혼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되는 동기부여가 됐다.

작가가 특별히 그림 과외를 받은 것은 중2 여름방학과 고3 때 입시를 위한 학원 과외 등 두 차례가 전부이지만 그녀는 스펀지처럼 회화방법을 익혀나갔었고 이후 미술대학까지 진학하게 됐던 것이다.

김건예의 그림 인생에서 또 한 번의 큰 도약을 하게 되는 시기는 2002년 독일 레지던시를 하고부터였다. 슈투트가르트에서 1년, 레히베르크하우젠에서 1년 6개월간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 김건예의 '갈필효과 기법'은 완전히 그녀의 화법(畵法)으로 고착되는 시기였다.

작가는 당시 하루 종일 그림에만 매달려 있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특히 2003년 독일 레히베르크하우젠에서의 첫 해외 개인전은 호응을 얻었고 이후 2010년부터 작가의 기법은 보다 체계화되면서 완성도가 높아져 갔다. 이전엔 밑칠을 먼저 하고 형태를 그렸으나 이때부터는 거꾸로 인물이나 풍경을 먼저 그린 후 화면 전체에 갈필효과를 입히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그녀의 그림은 초창기 때보다 그림 속 조형언어인 형태나 선이 훨씬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되고 보니 작가로서 제 스스로 작품에 대한 만족감도 더 높아지면서 현재까지 이 작업을 지켜오고 있는 셈입니다."

2010년 개인전 때는 평론가 김옥렬에 의해 그녀의 '갈필효과 기법'은 '회화적 그물망'이란 용어로 불리면서 작가의 회화적 시선이 현대인의 삶의 구조 즉 이중적이고 암시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익명의 인물(모델)을 통해 그 이면에 내재한 현대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회화적 형식으로 투시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야흐로 김건예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갈피효과에 의한 그리드(격자) 무늬는 현대인의 삶의 구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이자 거대한 네트워크의 상징이자 은유가 된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여 있는 건 예술이 아닙니다. 움직임은 발전이고 항상 깨어 있고 정체되지 않는 게 예술인의 자세라고 여깁니다."

김건예는 올해로 17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는 앞으로 갈필효과를 계속 가져가기 보다는 보다 발전된 화풍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작품을 하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그녀는 이미 독일에서 복제양에 대한 윤리문제를 소재로 한 복제인간 '쌍둥이'란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으며 국내에서는 사회 속에서 짊어진 현대인의 삶의 무게를 작품으로 표현한 '몸의 현재'라는 그룹전에도 참가한 바 있다.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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