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윤선경 씨 모친 故 최동옥 씨

88세의 최동옥 씨가 가족들과 외식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 가족제공.
88세의 최동옥 씨가 가족들과 외식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모습. 가족제공.

엄마, 고마워. 사랑해. 보고 싶어.

엄마가 위독하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갓 결혼한 지인의 신혼 집에서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나는 신혼부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집에 돌아가 동생과 전화를 하고 싶었다. 며칠 정도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동생의 말을 들으며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봤다. 다음날부터 연휴가 사흘간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다음 주 중반 정도에 큰 일을 치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상태를 알리는 가족 단톡방의 문자는 형제들의 질문과 동생의 대답으로 줄줄이 이어져 차츰 장례에 대한 의논으로 바뀌었다. 다섯 형제여서 형편도 생각도 제각기 달랐다.

장례식장을 어디로 할 것인가. 식장은 큰 걸로 할 것인가, 작은 걸로 할 것인가. 선산에 모실것인가, 국립묘지에 모실 것인가. 고별식을 할 것인가, 장례 미사를 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서 잠을 잘 것인가. 그러다 "엄마 아직 살아계신다"라는 동생의 말에 다들 문자를 멈췄다. 우리는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알리자는 댓글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저마다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해 넘어가는 시각이 되자, 맑은 날씨임에도 어딘지 비 오기 전 같은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불안해서 방과 거실을 서성이다 황급히 집을 나섰다. 그간 코로나 때문에 몸조심하느라 두 달간 성당을 가지 않았다. 저녁 7시 30분, 나는 엄마의 선종을 기원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고통을 덜어주시기를, 엄마가 잠자듯 돌아가시기를 기도했다. 스산하고 음울한 이상한 밤이었다. 지나고 보니 엄마는 그 시간 죽음과 사투를 벌였다. 뒤척이다 2시쯤 잠을 이뤘는데, 아침에 문자를 보니, 엄마는 새벽 2시 30분에 운명하셨다.

장례식장은 제일 큰 걸로 잡았다. 올 사람 없으니 작은 걸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 힘든 시기에 한 두 분만 오셔도 널찍한 공간에서 마음 편히 머물다 가셨으면 싶었다. 슬픔 중에도 조문 온 친구를 만나면 반가워서 웃었고, 이따금 엄마가 생각나면 울컥 목이 메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회환. 한 사람의 생애를 무엇으로 정리할 수 있을까.

입관 예절을 할 때 오랜만에 엄마를 만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엄마가 나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평생 남동생만 사랑하고 딸인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의 시신을 보는데 전혀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랑받지 않으면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마스크를 쓴 상태로 뺨에 뽀뽀하고 나오려다 다시 되돌아가 마스크를 내렸다. 입술에 닿는 엄마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몇 번이나 뽀뽀하고 엄마 귀에 속삭였다.

"엄마, 고마워. 사랑해."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가족 없이 임종을 맞았다. 면회 금지여서 동생도 엄마를 만날 수 없었다. 돌아가신 후였지만, 나는 엄마를 실컷 안아 드려야 했다.

크게 속 썩인 적 없다고, 엄마는 우리 부부를 좋아했다. 나는 엄마에게 해준 게 없었다. 동생이 엄마의 궂은 수발을 다 들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찾아가 안아주면 엄마는 "야가 왜 이라노." 하면서 밀어냈지만 싫은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故 최동옥 씨와 남편이 젊은 시절 찍은 사진. 가족제공.
故 최동옥 씨와 남편이 젊은 시절 찍은 사진. 가족제공.

장례식장에서 나와 화장장으로 갔다. 직원이 화장 후 나온 분골을 하얀 종이에 담아 각지게 접었다. 90년 삶이 책 한 권 부피밖에 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이니 생각이 멍하니 사방을 떠돌다 한 곳으로 귀착됐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나아질까? 언젠가는 덤덤하게 엄마를 떠올리게 되겠지.

카톡방에 드문드문 사진과 글이 올라왔다. 사망확인서.... 엄마 옷을 모두 버릴 테니 이의 없냐고 묻는 말.... 뒤늦게 들어온 부의금 알림 등등....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이젠 엄마가 없다. 엄마의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다. '무슨 차이가 있어. 떨어져 지낸 지 오래잖아. 이전에도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그냥 대구에 살아계신다 여기면 되지.'라고 애써 생각해본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세수할 때면 자꾸 눈물이 났다.

엄마, 꿈에 한번 나와 주세요. 보고 싶어요.

사랑하는 엄마(최동옥) 딸(윤선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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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관 연재물 페이지 : http://naver.me/5Hvc7n3P

▷이메일: t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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