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홍준의 시와 함께] 나의 갈등/ 이중기(1957~ )作

나의 갈등/ 이중기(1957~ )作

솔개 그늘 깔리는 불혹의 가을

단풍놀이 시들해진 동해에서 만났네

어린 날 내가 놓친 앞거랑

징검다리 물이끼를 닦아주던 물살이

등 푸른 고기떼 지느러미를 키우고 있었네

반갑다, 반갑다고

수평선을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는

근육질의 소용돌이로 달려와

반가사유상의 손으로 턱 괴고 앉아

삶을 되질하는 내 귀싸대기를 후려쳤네

쌀 거둘 땅에 왜 뱃살 붉은 복숭아만 따느냐고

사람의 양식으로 금수를 길러

인간을 굶주리게 하느냐고

따귀를 후려쳤네, 이 무슨 행패냐고

영천 사는 이중기 시인 이야기를 듣기는 일찍이 들어 흠모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다. 시인 몇이 모여 복숭아나무 가지 자른 거 늦가을 밭 가운데 모아 놓고 불 피운 이야길 들을 때면 은근히 샘이 났다. 여전히 내가 해 보고 싶은 건 그런 거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 지피는 거. 볼그족족 낮술 한 홉쯤들은 자신 듯 붉은 얼굴로 두런두런 하는 둥 마는 둥 밭일하는 거.

그중에 아마도 얼굴이 젤로 붉은 축은 이중기 시인일 것이다. 왜? '이런 쳐죽일 놈! 뭐라꼬?/쌀농사는 돈이 안 된다꼬?/물려준 땅 죄다 얼라들 주전부리나 할/복숭아 포도 그딴 허드렛농사만 짓고/뭐? 쌀을 사다 처먹어?' 아버지한테 귀싸대기를 가장 많이 맞았음으로. 아니다, 아니다, 불빛 같고 복숭아 같은 시인의 얼굴이 가장 자연을 닮아 멋지고 빛날 것이다. 어쩌다 시골을 찾아온 자들의 허여멀건 낯짝과는 달라도 한참을 다를 것이다.

이중기 시인은 '어린 날 내가 놓친 앞거랑/징검다리 물이끼 닦아주던 물살'을 동해에서 보는 사람이다. 시인은 한사코 '사람의 양식으로 금수를 길러'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 하는 자본주의로서의 셈법을 탓하고 꾸짖는 사람이다. 농사의 근본, 땅의 근본……. 시인이 말하는 건 늘 그런 거다. 그런데 근본, 그걸 지키는 건 '기준'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이제 우리네 농촌은 기준이 없다. 그 옛날 우리 마을 앞거랑 징검다리를 닦아주던 물살은 동해로 흘러 등 푸른 고기 떼 지느러미를 키우건만 도대체 우리는 무얼 하고 살고 있단 말인가?

유홍준 시인
유홍준 시인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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