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동을 걷다, 먹다] 10. ‘임청각’과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에 살기 시작했다. 서울이나 대구 등 대도시에 비해 안동에 사니 편안하다. 안동은 좋다. 날마다 안동을 걷고 안동음식을 먹는다.

익숙한 그것들이 어느 날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했고 안동이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동국시와 안동찜닭, 안동간고등어 혹은 헛제사밥의 심심한 내력도 내 귀에 속삭거리기 시작했다.

무심했던 안동에 대한 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투박한 내 입맛도 호사스럽게 안동을 먹게 됐다.

안동에 대한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그냥 안동이야기다.

◆정신문화의 수도

내앞마을에 건립된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정면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내앞마을에 건립된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정면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대구에서 안동으로 들어가다 보면 초입인 남선 고갯길 4차선 도로를 가로막고 세운 거대한 관문을 만난다. 이 문에는 '남례문'(南禮門)이라는 현판아래 녹색바탕에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안내문이 걸려있다. 우리나라 수도는 서울이지만 정신문화의 수도는 안동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남례문 말고도 안동으로 들고나는 동서남북 4곳의 길목에는 모두 이런 관문이 세워져 있다
남례문 말고도 안동으로 들고나는 동서남북 4곳의 길목에는 모두 이런 관문이 세워져 있다

남례문 말고도 안동으로 들고나는 동서남북 4곳의 길목에는 모두 이런 관문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한양(서울)에 흥인지문(동대문)과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홍지문(북대문) 등 4대문이 있었지만 안동에는 하나 더 보태 5대문(門)이다. 유교의 5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상징화한 문으로, 동인문(東仁門)·서의문(西義門)·남례문(南禮門)·홍지문(弘智門)·도신문(陶信門)이 그것이다.

이 문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순간, 안동이 조금 더 무겁게 다가왔다. 퇴계학의 본향에다 오래된 종가 고택들이 안동시내 어디에나 산재하고 선비의 기개나 예의범절이 압도하는 도시, 혹은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 의성 김씨 등 3대 권문세가(權門勢家)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는 소문이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가 아니라 고리타분하고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은 낡은 도시의 이미지로 추락시킨다.

안동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도 불린다.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鄒)나라 등 '공맹'(孔孟)을 망라한 유교문화의 원형을 제대로 계승발전하고 있는 유일한 도시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정조가 퇴계 선생 치제문에서 '추로지향'이라고 치하한 적이 있고, 공자의 77세손인 공덕성(孔德成) 선생이 1980년 도산서원을 방문, '추로지향'이라는 휘호를 적기도 했다.

21세기에 공자와 맹자 운운하면서 중국도 파괴해버린 유교문화의 본향으로 인정받고 있는 안동이 어떻게 우리 정신문화의 수도를 자처하게 된 것일까 의아했다.

◆임청각

안동을 다시 걸었다.

안동역에서 안동댐이 있는 방향으로 한참을 걷다가 용상동이나 임하방면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직진하게 되면 월영교가는 방향이다. 철길 때문에 생긴 굴레방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철길 아래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보행길목이 보인다. '임청각'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그냥 강변길로 걸어간다면 철길 가림방음벽에 가려져서 임청각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치게 된다.

임청각 군자정
임청각 군자정

'임청각'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다.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처럼 여겨지는 임청각은 그렇게 강변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도록 불편하게 숨겨져 있다. 보물 제 182호이자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불령선인'을 많이 배출한 곳이라는 이유로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99칸 집을 허물어 60칸만 남긴 채 그 자리에 있다.

임청각 앞에 철도 방음벽에는 "나라를 잃기는 쉽지만 나라를 되찾기는 백배 천배 더 어렵다"는 석주 선생의 불호령이 걸려있어 마음이 아릿했다.

독립운동의 본산, 안동.

그랬다. 안동을 우리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랑하는 건 오래된 전통과 문화를 지키면서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비정신을 실천한 독립운동의 발상지이자 본산이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청각으로 들어섰다. 코로나19바이러스로 인해 지금은 군자정과 사랑채 그리고 우물이 있는 안뜰 정도만 둘러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전후 몇 번이나 임청각을 찾았고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격찬할 정도로 '임청각팬'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선가 대청마루엔 문 대통령이 방문한 사진도 걸려있다.

임청각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군자정'은 학문을 탐구하는 수양공간이자 동시에 손님을 맞이하는 접빈(接賓)의 사랑방역할을 동시에 했다. 군자정과 사당 사이에는 정방형의 연못이 있다. 초겨울 햇살이 비친 연못주변에는 떨어진 모과가 은은하게 고택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임청각은 1519년 낙향한 이명이 건축했고 1767년 이종악이 고쳐지었다. 무려 500년이 지난 고성 이씨 종택이다. 우물 옆 사당에는 조상의 신주나 위패가 없다. 석주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면서 '나라를 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며 조상의 신주를 모두 땅에 파묻어버렸다. 종가의 종손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라없는 종가와 종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석주 이상용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용 초대국무령
사랑채에 걸린 작은
사랑채에 걸린 작은 '태극기'가 겨울햇살을 받아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채에 걸린 작은 '태극기'가 겨울햇살을 받아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공맹은 물론이고 오백여년 내려온 조상의 신위도 땅에 묻고 가산을 정리해서 50여가구의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떠난 석주. 그 때가 경술국치 다음 해인 1911년 1월6일이었다.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잇달아 개설한 석주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임청각은 석주선생이 만주에서 순국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반 동강이 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석주와 그 가족들의 독립투쟁 의지를 꺾겠다며 일제는 중앙선(청량리-경주) 철도를 개설하면서 철길을 만들면서 임청각을 허물고 가로지르는 철로 공사를 강행했다. 당시로서는 강변을 따라 철길을 놓은 것이 가장 쉬운 공사이기도 했겠지만 임청각을 허물어 독립운동에 나선 명문가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더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달 말 안동역사가 버스터미널 옆 송현동으로 이전하게 되면 철로이설공사도 내년에 본격화될 것이다. 그러면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임청각 복원사업'도 본 궤도에 올라 철길 가림막과 방음벽이 철거될 것이다. 얼마 후에는 철길이 나기 전 본래의 임청각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내앞(川前)마을'은 독립운동의 또 다른 산실이다. 안동 시내에서 안동대를 지나 임하방면으로 가다가 만나는 강이 봉화에서 발원한 반변천이다. 임하댐을 거쳐 내려 온 강줄기 언저리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마을이 의성 김씨 집성촌이 내앞 마을이다.

내앞은 천전(川前)의 한글 이름. 내앞마을은 석주 선생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동삼의 생가가 있고, 협동학교 설립지 및 백하 김대락선생의 생가 '백하구려'도 잘 보존돼있는 살아있는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내앞마을에 있는 옛 협동학교 자리에는
내앞마을에 있는 옛 협동학교 자리에는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내앞마을에 있는 옛 협동학교 자리에는
내앞마을에 있는 옛 협동학교 자리에는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내앞마을에 있는 옛 협동학교 자리에는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2007년 안동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정신을 기리기 위해 안동독립운동기념관으로 건립했다가 2014년 경북독립운동기념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안동에서도 이 내앞마을이 독립운동의 실제 중심지였고 협동학교 등 독립운동의 산실이기 때문에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한 것이다. 전시실에서 만난 6.10만세운동을 이끈 막난 권오설 선생의 벌겋게 녹슨 '철제관'은 당시 일제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드러내준다. 사회주의계열의 노동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권오설은 체포돼서 고문을 당하다가 옥사했다. 일제는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철관을 사용했고 심지어 용접까지 했다. 영혼까지 관속에 가두려한 것이다.

임청각과 내앞마을까지 다녀오고서야 왜 안동이 우리 정신문화의 수도여야 하는지를 알게 됐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저항하고 깨어나서 행동하는 애국자들이 안동에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1894년 갑오의병(甲午義兵)에서 1945년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학생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인들이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다. 2005년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운동유공자 700명 중에서 안동출신이 무려 277명에 이르고 독립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의 30%가 안동출신이었다는 독립운동사 자료를 보면 안동은 고마운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서명수 슈퍼차이나 대표
서명수 슈퍼차이나 대표

서명수 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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