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녀들의 순정은 어디로인지 쌀쌀한 가을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화류계 방면에 진출하여 웃음과 술을 팔기까지도 헌신짝같이 바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든지 최근 여경을 거쳐 소년심리원에 이송된 사건 가운데 밀매음 소녀들의 수가 점증하고 있는데~.'(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9년 12월 3일 자)
사춘기의 허황됨일까, 생존의 벼랑 끝 선택이었을까. 화류계에 발을 디딘 소녀들 이야기다. 한창 꿈 많은 청춘의 나래를 펼 그들이었기에 안타까움이 더 컸다. 그 안타까움은 쌀쌀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소녀들의 순정으로 빗대졌다. 당시 누더기를 걸치고 뼈만 남은 여윈 얼굴의 아이들을 보는 것은 낯설지 않았다. 깡통을 차고 힘없이 거리를 헤매는 걸식 아동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그렇다 보니 생존의 갈림길에서 화류계의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화류계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부침을 했다. 1948년 2월에는 공창이 폐지됐다. 공창은 구한말 일본인 거류 지역의 유곽이 출발이었다. 일본인들의 유곽으로 등장한 매춘이 공창제도로 변했다. 대구부는 공창을 폐지하면서 공창폐지대책위원회를 운영했다.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2개월간 성병 치료를 받도록 했으며 이들의 교육 등을 위해 48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화류계 청산 이후의 생활 안정에 힘을 보태려 했다. 공창이 폐지된 이후에는 사창가가 뒤를 이었다. 대구의 자갈마당도 같은 범주에 속했다.
대구 등 주요 도시에는 해방 직후부터 다양한 유흥업소가 생겼다. 미군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댄서 홀이나 카바레 등의 유흥시설이 늘어났다. 경북도에만 댄서 홀이나 카바레 등 유흥업소가 해방 2, 3년 만에 700여 개나 되었다. 현실의 고달픔을 유흥으로 달랜 때문인지 유흥업소를 찾는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1947년 9월의 경우 대구세무서가 거둬들인 유흥음식세가 560여만원으로 8월보다 4만여원이나 많았다.
식량난과 경제난에도 유흥 접객업소에 사람들이 몰리자 1948년 12월부터 요정, 카페 등의 영업을 중지시키는 유흥영업법안이 입법화되었다. 사회의 잘못된 풍습이 번지는 것을 막고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유흥업소 폐문을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요리업, 바, 카페, 카바레, 댄스 홀, 기생 작부 영업 등이 해당됐다. 문을 닫은 업소들은 대중식당이나 여관으로 전환할 수 있게 했다.
영업정지의 효과는 어땠을까. 영업시간은 종전의 밤 11시에서 10시로 줄었지만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애초 기생 여급이 접대부로 전환됐고 유흥업소들은 명칭만 바꾸고 영업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금지된 노래와 춤은 확성기의 레코드 음악으로 대체했다. 유흥업의 영업정지가 공염불이라는 비난이 거세지자 1949년 하순에는 영업을 허용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영업 해제 이유에는 기생이 가진 민속예술의 질이 저하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무엇보다 유흥음식세 수입의 필요성이 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소녀들의 순정'은 있어서는 안 될 70여 년 전의 옛이야기이다. 본디 유흥(遊興)은 흥겹게 논다는 의미다. 코로나19가 닥친 올 세밑에는 이런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하지만 말이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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