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보릿고개 생각나는 이팝나무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향교 주변에 있는 이팝나무.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향교 주변에 있는 이팝나무.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은 지난해 천연기념물 제561호로 지정됐다.

"옛날 경상도 어느 마을에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시부모께 순종하며 쉴 틈 없이 집안일을 했지만, 시어머니는 트집을 잡고 구박하며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켰다. 큰 제사가 있던 날 조상들께 올리는 메(밥)를 짓게 되었는데 잡곡밥만 짓다가 쌀밥을 지으니 혹시 밥이 잘못돼서 시어머니께 야단맞을까 싶어 겁이 난 며느리는 뜸이 잘 들었나 보려고 밥알 몇 개를 먼저 입에 댔다. 공교롭게도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제사상에 올릴 메를 먼저 퍼 먹는다며 온갖 구박을 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뒷산에 올라가 극단적 선택을 했고, 이듬해 며느리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 하얀 쌀밥 같은 꽃을 가득 피워냈다." 이팝나무 전설은 동네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이밥과 굶주림, 가난이 줄거리의 공통분모로 나온다.

◆이밥에 고깃국 그리던 가난한 시절

보릿고개를 호되게 겪던 시절에는 봄철 나무에 피는 꽃을 보고 곡식이나 먹거리를 상상하며 배고픔을 달랬다. 지금은 가수 진성이 부르는 가요 '보릿고개'로 그때를 추억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생겼지만 베이비부머들이 어릴 적까지도 끼니 걱정을 하는 집이 많았다. 곳간에 양식이 바닥났지만 먹을 게 없던 시기에 하얀 꽃이 나무 가지에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밥(쌀밥)을 사발에 수북수북 담아놓은 고봉밥을 상상하며 이팝나무라고 불렀다. 이밥은 조선시대 벼슬을 해야 이씨 왕조에서 주는 쌀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다고 해서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팝나무는 남부지방이나 중부지방에 자라는 낙엽성 교목으로 물푸레나무과에 속한다. 분포 지역은 전라·경상도 등 남부지방이며, 서해안을 따라서 인천까지, 동해안으로 포항까지, 내륙으로 대구를 포함한다. 다 자라면 높이가 약 20m나 되며 보통 잎은 긴 타원형이다. 암수딴그루로 4, 5월에 흰색 꽃이 새로 나온 가지 끝부분에서 핀다. 열매는 타원형 핵과이며 10, 11월에 검보라색으로 익는다.

대구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구릉지에 있는 이팝나무 군락.
대구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 구릉지에 있는 이팝나무 군락.

대구 도심에서 가까운 달성군 옥포읍 교항리와 경북 경산시 자인면 계정숲의 이팝나무 군락지가 있다. 달성 교항리 군락지는 마을 평탄한 구릉지 숲에 수령이 300년이 넘는 나무를 비롯하여 이팝나무 수십 그루가 큰 군락을 이룬 풍치림이다. 꽃 피는 5월 초에 멀리서 이곳을 바라보면 숲 전제가 흰 구름이 떠있는 모양새다. 옛날 마을 사람들이 숲을 해치는 사람에게는 백미 한 말씩 벌금을 물려 나무를 보호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런 연유로 달성군은 군목을 은행나무에서 이팝나무로 바꿨다.

◆농사 풍년 흉년 예측하는 기상목(氣象木)

이팝나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장성우가 쓴 시 「이팝나무꽃 필 무렵」에 이팝나무 꽃에 얽힌 다른 사연을 잘 적었다.

'입하(立夏) 가까워지고/ 줄지어 흐드러지게 피어서/ 혼자서 이팝나무 간직한 사랑은/ 은밀한 내 사랑 이팝나무 꽃이라네요// 여름 길목에서 변신한 꽃/ 입하에 피는 꽃 이팝 꽃이 되었다는데// 지독한 보릿고개/ 허기에 지친 애환 서린 꽃/ 쌀밥 풍년을 기다리는 서민의 심정// 이팝 하얀 꽃 구름처럼 일렁이고/ 눈이 온 것 같다는 찬사의 거리에/ 녹색 잎사귀 하아얀 이팝꽃 나라 꽃/ 오월 계절 따라 이팝나무 초록마을 거리'

여름에 들어서는 입하 무렵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불렀고 입하의 발음이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이팝나무를 '입하목' 으로 부른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팝나무는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신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흰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꽃이 많이 피지 않은 해는 흉년이 든다고 믿었다.

옛날 수리시설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볍씨를 뿌려 못자리를 만들거나 모를 무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철에 물이 풍부하면 풍년이 들고 물이 부족해 가뭄이 들면 흉년이 들기 마련이다. 습기를 좋아하는 이팝나무가 꽃필 무렵 모내기를 하는데 땅에 수분이 충분하면 꽃이 활짝 피고, 수분이 부족하면 꽃을 제대로 피울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팝나무의 꽃피는 상태를 보고 그해 농사의 풍년 여부를 짐작했다.

비단 이팝나무뿐만 아니라 물을 좋아하는 버드나무의 상태를 보고 기상을 예측하기도 했다. 경북 청도군 각북면의 덕촌리 개울가에 있는 털왕버들(천연기념물 298호)도 기상목의 전설이 있는데 이른 봄 잎이 한꺼번에 피는 해에는 풍년이 들고 가지마다 잎이 제각각 피면 흉년이 든다는 얘기다. 기상목에 관한 전설에는 우리 선조들이 나무 하나를 보더라도 예사로 보지 않는 생활의 슬기가 담겨져 있다.

대구 중구 제일교회 북쪽에 있는 이팝나무 일명
대구 중구 제일교회 북쪽에 있는 이팝나무 일명 '현제명나무'.

◆스토리가 있는 이팝나무

대구 중구 동산의 제일교회 마당 북쪽, 신명고등학교 교정 못 미치는 언덕에 도심에서 보기 드문 수령 200년이 훨씬 넘는 이팝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있다. 이른바 '현제명 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음악교육자인 현제명 선생이 대구 계성학교에 다닐 때 등하교하던 길옆에 서있어 그가 이 나무 아래서 음악적 감수성을 키우지 않았겠나 여겨서 대구시가 보호수로 지정하고 이렇게 명명했다.

지난해에는 경북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포항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흥해읍 마산사거리 못 미치는 오른쪽 구릉지에 흥해향교가 있다. 해마다 5월이면 활짝 핀 하얀 꽃이 향교 주변과 잘 어울려 경관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원래 경상북도 기념물 제21호인 '의창읍의 이팝나무 군락'을 문화재청이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으로 이름을 바꿔 천연기념물 제561호로 지정했다.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은 향교를 세운 기념으로 심은 이팝나무의 씨가 퍼져 형성된 군락이라고 전해지기도 하고, 옛날 주역을 습득한 선비들이 전쟁을 예측하고 급할 때 무기를 만들기 위해 심었다는 설(說)도 있다. 향교 주변에 자라는 이팝나무 노거수 20여 그루는 평균 가슴높이 둘레가 2m 넘고, 평균 높이는 12m 이상이다.

검보라색으로 익는 이팝나무 열매.
검보라색으로 익는 이팝나무 열매.

이팝나무가 나오는 고전은 흔하지 않다. 존재감이 미미하거나 생활에 널리 쓰이지 않아서 그럴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고전소설 흥부전에 이팝나무가 소환된다. "하얀 쌀밥이 이팝나무만큼이나 쏟아졌다. 스물다섯 놈 새끼들이 달려들어 퍼먹고 배가 남산만큼이나 커졌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흥부가 첫 번째 박을 타니 나온 게 쌀밥이었다. '밥 굶기를 밥 먹 듯이' 하던 식구들이 바라던 최고 소망인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쌀밥을 처음 본 흥부의 흥분한 마음을 이팝나무에 빗댔다.

도심 가로수나 공원, 고속도로 IC 주변에 조경수로 심은 이팝나무의 꽃이 '고봉'으로 피는 계절이다.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하고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보릿고개를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해도 우리사회 그늘진 곳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는 사람, 가난하지만 사회복지 혜택조차 받지 못 하는 처지도 있을 것이다. 하얀 꽃이 만발한 이팝나무를 보며 쌀밥의 희망을 품었던 5월에 어려운 이웃이 있다면 기꺼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면 어떨까.

편집부장 chungham@imaeil.com

이종민
이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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