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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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마로니에?  내 이름은 칠엽수!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마로니에? 내 이름은 칠엽수!

    〈strong〉♩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strong〉 〈strong〉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듯이〈/strong〉 〈strong〉덧없이 사라진 다정한 그 목소리〈/strong〉 〈strong〉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strong〉 〈strong〉그 길의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strong〉 〈strong〉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strong〉 1970년대에 유행한 박건의 노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의 가사 2절이다. 슬픈 듯 감미롭게 파고드는 감성적인 가사와 호소력 진한 선율 덕분에 가을과 마로니에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낭만과 추억을 떠올린다. 이 노랫말의 의미를 알고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사람의 연배는 적어도 초로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대중가요의 영향력 때문일까. 마로니에라는 이름은 알지만 '가시칠엽수'라는 다른 이름은 낯설다. 마치 라일락은 잘 알면서 '서양수수꽃다리'라고 말하면 생경하게 느끼는 것처럼 대중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칠엽수는 이름 그대로 나뭇잎이 일곱 장이다. 어쩌다 다섯 장, 아홉 장짜리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일곱 장의 잎사귀를 매달고 있다. ◆파리의 명물 가로수 마로니에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돌궐족(突厥族)으로 알려진 튀르크족은 말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했다. 말이 쉽게 숨차서 헐떡거리며 침을 흘리는 폐기종을 앓을 때 그들은 밤처럼 생긴 큰 열매 '말밤'(horse chestnut)을 먹였다. 프랑스에서는 말밤을 '마롱'(marron), 그 열매가 열리는 나무를 '마로니에'(marronnier)라 불렀다. 바로 '서양칠엽수' 혹은 '가시칠엽수'의 다른 이름이다. 발칸반도가 원산지인 마로니에가 유럽으로 퍼진 계기는 프랑스가 가로수로 심은 이후부터다. 잎이 크고 나무의 수형은 단순한 편이다. 파리 북부 몽마르트르 언덕과 센강을 따라 뻗어 있는 샹젤리제 거리의 마로니에 가로수는 파리의 명물이다. 〈strong〉센강 변의 배들, 물에 비친 배 그림자 순간마다 달라지고 웬 마로니에는 그렇게 많은 꽃燈(등)을 세우는지, 그 꽃燈 뒤에 무엇이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고 싶지만 무서움은 다만 내게 있고 흐르는 노래는 옛날 노래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strong〉(이하 생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2000) 이성복 시인이 파리에 머물면서 지은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0」이다. 연작시에는 마로니에를 여러 차례 소환해 시내 풍광을 읊으면서 이방인의 깊은 소회를 담았다. 아무튼 해마다 잎을 잔뜩 펼쳐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녹음 덕분에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 히말라야시더(개잎갈나무), 은행나무 등과 함께 세계적 가로수로 꼽힌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마로니에는 서울 덕수궁 평성문(平成門) 앞에 아름드리 거목으로 성장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한 네덜란드 공사가 1912년 회갑을 맞은 고종을 위로하기 위해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하니 최소 110살은 넘는다. 이후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가 일본 특산의 칠엽수를 들여와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캠퍼스에 심으면서 국내에 보급됐다. ◆경북천년숲정원의 칠엽수길 장관 국내에 유럽 마로니에, 즉 가시칠엽수는 그리 흔하지 않다. 대구경북에는 대부분이 일본의 칠엽수다. 일제강점기 때 유럽에서 왔든 일본에서 왔든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에 나오는 나무 이름은 칠엽수다. 줄기가 쭉쭉 뻗어 키가 30m까지 자라며 사방으로 가지를 넓게 펴는 수형이나 널따란 잎의 형태는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굳이 칠엽수와 가시칠엽수를 구분하자면 열매에서 결정적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칠엽수 열매에는 가시의 흔적만 남아 있고 잎의 뒷면에 적갈색 털이 있는 반면 가시칠엽수는 열매 표면에 가시가 촘촘히 돋아 있고 잎 뒷면에 털이 거의 없다. 칠엽수는 5월쯤 가지 끝에 원뿔 모양의 꽃차례가 하늘을 향해 달린다. 꽃대 하나에 100개에서 300개 정도의 작은 유백색 꽃이 모여 있어 인상적이다. 꽃말이 '박애'인 칠엽수는 달콤한 꿀을 아낌없이 준다. 꿀샘이 깊고 양도 많아서 최근 밀원식물로 인기다. 꽃이 피는 초기에는 벌을 유혹하기 위해 꽃잎 중간에 노란색의 허니 가이드(honey guide)가 발달하고 꿀 분비가 끝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밀원식물의 전형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이 최근 밀원 가치를 평가한 결과, 아까시나무보다 꿀 생산량이 더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1㏊ 면적에 칠엽수 80그루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약 64㎏의 꿀 생산이 가능한데 이는 아까시나무의 38㎏보다 1.7배 많다고 한다. 가로수, 조경수, 녹음수로 각광받아 온 칠엽수가 밀원식물로도 명성을 더 높일 것 같다.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자락에 올해 4월에 개장한 경북도 제1호 지방정원인 '경북천년숲정원'에는 300m나 되는 칠엽수 가로수길이 펼쳐져 있다. 30년 넘는 칠엽수 170여 그루가 길 가장자리에 심어져 기다란 터널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경산시 영남대학교 캠퍼스 천마로에 도열하듯이 서 있는 칠엽수의 넓은 잎사귀는 여름 뙤약볕을 피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 대구에서는 팔공산톨게이트로 가는 불로지하차도 부근과 황금고가교에서 두리봉터널로 이어지는 청수로, 범어공원 능선 일부, 대구어린이세상(어린이회관) 정원, 계명대 성서 캠퍼스 등에 크고 작은 칠엽수 수십 그루가 미관을 푸르게 장식하고 '대프리카'의 열기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있다. ◆독성 있는 열매 조심 9월에 접어들면 꽃자리에 골프공만 한 열매가 주렁주렁 황갈색을 띠며 탐스럽게 익는다. 땅에 떨어져 껍질이 벌어지면 밤처럼 생긴 종자가 나온다. 대구수목원 등은 이맘때쯤 칠엽수 열매를 먹지 말라는 안내문을 곳곳에 나붙인다. 사포닌, 글루코사이드, 타닌 등 물질이 사람에게 독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열매를 날것으로 먹으면 구토와 설사를 일으키게 되고 심하면 위경련 등 위장에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일본인들은 칠엽수를 도치노키(とちのき)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栃(회)·橡(상) 자로 쓴다. 식량 여유가 없던 시절 칠엽수가 많은 곳에서는 가을에 열매를 주워서 향토식품으로 이용해 왔는데 이를 이용하여 만든 떡의 이름이 바로 도치모치(栃餅)다. 유럽에서는 칠엽수 열매 추출물을 옛날부터 치질·자궁 출혈 등의 치료약으로 사용해 왔으며 최근에는 동맥경화증이나 부스럼으로 부어오른 종창(腫脹)의 치료에도 쓴다고 한다. ◆낭만과 사색의 그늘 제공 10월의 따가운 가을 햇살은 녹음의 커다란 잎사귀들을 시나브로 누렇게 물들인다. 11월엔 아예 갈색으로 바싹 굽다시피 한다. 마로니에가 늘어선 길에는 구수한 낭만과 예술적 영감이 묻어나는 것 같다. 많은 예술가들이 담론을 나눈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는 유명한 화가들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아래 삼삼오오 모여 마로니에를 태워 만든 목탄으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마로니에 넓은 잎이 피고 지는 언덕에서 화가들이 만나 교감하고 예술혼을 꽃피웠다. 특히 네덜란드 출신의 빈센트 반 고흐는 뛰어난 예술적 비전과 강렬한 감정을 세상에 선물했다. 「꽃이 핀 마로니에 나무」(Blossoming Marronnier Tree)는 그의 천재성이 담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파리의 풍경화 중에서 유화 「꽃이 핀 마로니에 나뭇가지」가 있다.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했던 고흐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1890년 퇴원한 뒤 파리 근교로 이사하고 그의 생애 마지막 해에 그린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문학적으로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는 소설 『구토』에서 마로니에에 빗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그의 철학을 담았다.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아이들처럼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하려는 순간 구토증을 나타내더니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같은 증상을 보이게 된다. 공원 벤치에 앉아 바라본 마로니에의 뿌리도 마찬가지로 구토 대상이었다. 마로니에 나무는 본질을 못 밝혀도 그 자리에 이미 우두커니 서 있다. 로캉탱은 마로니에를 보고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그곳에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반면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안네프랑크나무'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박해를 피해 25개월간 은신한 소녀에게 희망과 위로를 안겨준 나무였다. 1944년 8월 체포돼 수용소에서 16세 나이로 숨진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일기에서 언급했던 '밤나무'는 말밤나무의 준말이며 마로니에다. 그 나무는 2010년 폭풍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strong〉"폐 속의 답답한 공기를 날려 보내고 싶어서, 나는 거의 매일 아침 다락방으로 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서 푸른 하늘과 벌거벗은 밤나무를 올려다본다. 밤나무의 가지에 맺힌 빗방울이 은빛으로 반짝이고 갈매기와 새들은 바람 위로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이것들이 존재하는 한, 난 아마 살아남아서 이걸 볼 수 있을 것이고, 이것들이 있는 한, 나는 불행할 수 없다."(1944년 2월 23일)〈/strong〉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2023-09-01 16:30:00

  •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꽃이 없는 게 아냐! 무화과(無花果)나무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꽃이 없는 게 아냐! 무화과(無花果)나무

    8월부터 무화과(無花果)가 익기 시작한다. 누르무레한 껍질을 살짝 벗겨 입에 넣으면 꿀처럼 달큼한 과육이 한가득하다. 무화과는 짓무르고 상하기 쉬워 제철에만 맛볼 수 있다. 무화과를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꽃이 없는 과일'이다. 실상은 꽃턱과 꽃대궁이 주머니처럼 자라나면서 그 속에 수많은 작은 꽃들을 품고 있다. 무화과나무의 고향은 지중해 연안으로 알려져 있으며 기독교 『성경』에는 과일나무나 비유와 상징으로 수십 차례 나온다.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구약성경 「창세기」 3장 6, 7절의 내용이다.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뱀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은 남자와 여자는 알몸인 것을 알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부를 가렸다. 인류 최초의 옷이 무화과나무 잎인 셈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비유 아담과 하와(이브)가 하느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과일을 따먹은 '원죄' 탓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들의 후손들이 여러 가지 수난과 고초를 겪게 되는 이야기에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 올리브나무와 더불어 다양한 비유로 등장한다. 구약성경 「신명기」 8장 8절의 "그 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여는 땅이요, 올리브 나무 기름과 꿀이 나는 땅이다"는 풍요로운 복지(福地)의 상징이다. 「열왕기」 하 20장 7절의 "이 말을 전한 다음 이사야는 무화과로 만든 고약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무화과로 만든 고약을 가져다 종기에 붙이자 히즈키야 왕의 병이 나았다"는 치유를 의미한다. 신약 성경 「루카복음」 6장 44절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다"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무화과는 '좋은 나무'의 본보기다. 반면 「마태오복음」 21장 19절에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가 나온다.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가까이 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밖에는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 맺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나무가 즉시 말라 버렸다. 예수가 어느 날 아침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길 옆에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아침에 시장해서 열매를 따 먹으려고 가까이 가 봤더니 잎만 무성했다. 예수는 나무를 저주했고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허울만 남은 유대 종교와 제사장을 열매 없이 잎만 가득한 무화과나무에 빗댔다고 해석된다. ◆우리가 먹는 과육의 비밀 무화과나무는 손바닥 모양의 넓은 잎을 가졌고 잎겨드랑이에 주머니 모양의 열매가 맺힌다. 열매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이고 8∼10월에 거무튀튀한 자주색이나 황록색으로 익는다. 우리가 먹는 무화과 열매 속에는 수많은 작은 꽃을 품고 있다. 꽃이 사람들 눈에 바로 보이지 않도록 숨겨져 있어 은화과(隱花果)라고도 부른다. 무화과의 열매 속에 있는 꽃들은 어떻게 꽃가루받이(수분)를 할까? 열매 속으로 통하는 구멍이 워낙 작아 바람마저 이용할 수 없는 처지다. 그래서 무화과만을 수분시켜주는 전담 곤충인 무화과말벌의 도움을 받는다. 근래에 알려진 사실은 세계에 무화과나무가 1천여 종이 있고 무화과말벌도 1천여 종에 이른다는 것이다. 무화과말벌은 작은 구멍을 통과할 수 있도록 몸길이가 1㎜정도로 작다. 무화과나무 열매는 수꽃과 암꽃으로 구분된다. 수꽃은 꽃가루가 달린 수술과 짧은 암술을 갖고 암꽃은 긴 암술을 갖는다. 무화과말벌 수컷은 암컷이 들어있는 알을 찾아서 구멍을 내고 부화하기 전에 수정을 한다. 암컷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탈출 구멍을 내고 무화과 안에서 죽는다. 암컷은 수열매 속에서 태어나서 수꽃의 꽃가루를 묻혀 구멍을 빠져 나와서 다른 암 열매 꽃 주머니로 들어가 꽃가루를 암꽃에 묻힌다. 무화과말벌은 무화과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일생을 보낸다. 무화과말벌의 산란은 수 열매에만 하게 되고 암 열매에는 꽃가루 전달만 한다. 우리가 먹는 무화과 속에는 무화과말벌의 암컷, 수컷, 애벌레의 사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기우다. 재배하는 무화과나무는 대부분 종자가 형성되지 않고 암꽃의 씨방이 발달한 '단위결실'이다. 다시 말해 무화과말벌이 꽃가루받이를 하지 않아도 열매가 굵게 자라고 익기 때문에 무화과의 꽃과 씨방은 깨끗하다. 21세기 이스라엘 요르단 계곡에서 1만1천400년 된 신석기 집터에서 말린 무화과가 발견됐는데 예전에 가장 오래된 작물로 여겼던 밀과 보리보다 시기가 1천년이나 앞섰다. 발견된 무화과를 분석한 결과 오늘날 재배되는 무화과처럼 씨앗을 맺는 능력이 없어 '작물'로 추정했다. 국내에서 널리 재배되는 무화과나무는 탐스러운 열매만 맺을 뿐 종자가 없다. 그래서 자라는 무화과는 꺾꽂이나 포기나누기, 휘묻이 등의 무성 번식에 의존한다. 축축한 땅에 1년생 가지를 20cm쯤 잘라서 땅에 꽂아 두면 뿌리가 내려서 잘 산다. ◆한국 토종 천선과나무 서양에서 아주 먼 옛날부터 재배한 유실수가 무화과나무라면 우리 땅을 비롯하여 동양에는 무화과와 사촌뻘인 천선과(天仙果)나무가 있다. 남해안 바닷가 야산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따뜻한 지역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무화과 열매보다는 훨씬 잘지만 생김새가 무화과를 닮아서 금방 눈에 띈다. 잎겨드랑이에 달린 구슬만 한 천선과는 말랑말랑하며 익었을 때는 진한 보라색을 띤다. 무화과처럼 육질이 부드럽고 작은 씨앗이 씹히지만 단맛은 거의 못 느낄 정도다. 단맛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입맛에는 '이게 무슨 맛이야, 이걸 왜 먹어'라는 느낌이다. 천선과는 '하늘의 신선이 먹는 과일'을 뜻한다. 경상남도 창원의 다호리 고분 발굴 당시 천선과로 추정되는 열매가 나왔다. 서양의 무화과나무 재배종이 국내에 들어오기 훨씬 전인 초기 가야시대 고분에 저승길로 떠나는 망자의 부장품으로 넣어 줄 정도라면 평소에 천선과를 즐겨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선과 열매도 천선과말벌에 의해 수정되고 씨앗을 맺는다. 나무에 상처를 내면 유백색의 액체가 나온다. 유액은 상처 치료 등 항균 작용을 한다고 전해진다. ◆검투사들의 스테미너 식품 무화과는 고대부터 스테미너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좋아한 과일이며 고대 그리스 올림픽 출전 선수와 로마 검투사들의 애용 식품이었다. 뽕나뭇과의 무화과나무는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라므로 무화과는 요사이 무공해 식품으로 인기다. 폴리페놀 등의 성분은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노화, 성인병의 주범인 유해산소를 없애는 항산화 효과가 있고 변비 예방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적 변비 치료약이 나오기 전에는 무화과 열매를 완하제(緩下劑)로 사용됐다. 열매를 따면 꼭지에서 나오는 하얀 유액은 치질치료나 살충제로도 사용됐다. 무화과에는 비타민A와 칼슘, 인 같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돼 있고 식이섬유도 풍부하다. 단백질 분해효소인 피신(ficin)이 들어 있어 소화촉진은 물론 주독과 어독을 풀어준다. 우리나라에 무화과나무가 도입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꽃 없이 열매가 열리는데 그 빛이 푸른 자두 같으면서 좀 길쭉하다. 맛이 달아 식욕을 돋우며 설사를 멎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짐작컨대 약용식물로 들어온 것 같다. 19세기 후반 김옥균 등이 일본에서 신품종을 들여오면서 소규모 과원이 조성됐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소득 작물로써 무화과 재배단지를 만들면서 대량재배의 길을 열었다. ◆그리스·로마신화에도 등장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종교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에도 등장한다. 대지의 신인 데메테르가 피랍된 딸 페르세포네를 찾아 헤매다가 피탈로스라는 사람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데메테르는 감사의 선물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주었고 피탈로스의 후예들은 무화과나무 재배의 독점권을 얻어 크게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로마 건국신화의 로룰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태어나자마자 강가에 버려졌으나 다행히도 무화과나무 가지에 걸려 하류로 떠내려가지 않고 어미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이후 양치기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다. 로룰루스가 늑대의 젖을 빨았다는 숲 속의 무화과나무는 공회로 옮겨져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의 유구함을 나타내는 신화의 단면들이다.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이하생략) 김지하 시인이 1986년 펴낸 시집 『애린』에 실린 「무화과」에는 우리에게 자아성찰이나 내면의 성숙이 제대로 됐는지 되묻는 듯하다. 암울한 시대에 '내게 꽃 시절이 없었어'라고 투덜대며 신세타령을 하자 무화과는 밖으로 꽃을 피우는 삶보다 더 값진 '속꽃'을 피운다는 걸 일깨워준다. 팩트와 가짜뉴스를 교묘히 버무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진영이 힐거(詰拒)한다. 선동과 구호만 있고 민생을 위한 정치는 실종됐다. 그들이 훈장처럼 내세우던 도덕성도 뒷전이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 많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1990년대 초 「죽음의 굿판을 거둬치워라」라고 일갈하며 생명운동에 앞장섰던 시인이 새삼 무화과나무에 오버랩된다. 선임기자 chungham@korea.com

    2023-08-04 16:30:00

  •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미녀는 왜 석류를 좋아할까’ 석류나무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미녀는 왜 석류를 좋아할까’ 석류나무

    짙은 초록 가지에 붉은 점 하나 (濃綠萬枝紅一點·농록만지홍일점) 사람 감동시키는 봄의 경치 많을 필요 없어라 (動人春色不須多·동인춘색불수다) 중국 송나라 때 문장가이자 개혁가인 왕안석(王安石)은 「영석류시」(詠石榴詩)에서 아름답게 핀 선홍색 석류꽃의 강렬한 인상을 '홍일점'(紅一點)이라고 읊었다. '많은 남자들 틈에 있는 오직 하나뿐인 여자'라는 풀이 외에도 오늘날에는 '여럿 속에서 이채(異彩)를 띠는 오직 하나'를 비유할 때도 쓰는 말이다. 봄에 가장 늦게 새 잎을 내미는 게으른 나무 축에 드는 석류나무는 초여름 신록이 무성한 가지에 붉은 석류꽃이 하나씩 불타듯 핀다. 석류꽃이 피는 음력 5월은 석류달[榴月]이라 부른다. ◆안석국 신기한 과일나무 석류의 이름은 기원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무제의 명을 받고 서역에 파견되었던 장건(張騫)이 돌아올 때 안석국(安石國)에서 처음 가져왔기 때문에 안석류(安石榴)로 불렸다가 뒷날 줄어서 석류(石榴)가 됐다. 안석국은 고대 파르티아 왕국으로 지금의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서기 226년까지 존립했던 나라다. 석류나무는 아름다운 꽃과 독특한 모양의 열매 때문에 수많은 시가(詩歌)의 소재가 됐다. 고려에서는 자기(磁器)의 문양으로도 쓰였고 『고려사』에 의종 5년(1151년)에는 기록으로도 확인됐다.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석류 문양의 일부가 들어 있는 당초문(唐草紋)이 유행한 것으로 볼 때 7세기 이전에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류나무는 석류나뭇과의 낙엽활엽관목 또는 소교목으로 높이가 7m 정도까지 자란다고 하지만 보통 2~4m 정도다. 나뭇잎이 긴 타원형으로 마주나고 가지 끝에서는 모여 난다. 꽃은 가지 끝이나 잎겨드랑이에서 6월부터 피기 시작해 가을까지 이어진다. 붉은 꽃잎은 5~7갈래의 꽃받침 안에 여섯 장 꽃잎이 겹쳐서 핀다. 가을에 익은 열매의 크기가 어른 주먹 정도로 굵고 끝에 꽃받침 조각이 붙어 있는 작은 달항아리나 호리병 모양이며 황갈색 껍질은 붉은빛을 띤다. 열매 속은 얇고 반투명한 호주머니 형태의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는데, 방마다 작은 유리 구슬 같은 투명한 씨앗을 알알이 품고 있다. 중국 남부에는 석류의 씨가 미인의 가지런하고 흰 치아와 닮았다고 해서 이가 곱고 입술이 아리따운 미인을 '석류교'(石榴嬌)라 불렀다. ◆부귀의 상징, 석류꽃 부귀와 완숙한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석류꽃과 다산을 상징하는 열매가 모두 완상할 높은 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옛사람들의 집 안마당 한쪽에 석류나무가 서 있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조선시대 강희안이 쓴 원예서 『양화소록』의 「화목구품」에는 석류가 3품으로 세 번째 등급에 들어 있다. 유박이 지은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에는 해류(海榴)가 2등, 석류가 5등에 있고, 「화목28우」에서는 해류를 '다정한 친구'라는 의미의 정우(情友), 석류를 '아름다운 친구'라는 의미로 교우(嬌友)라 했다. 또 「화품평론」에 해류를 "중국 월나라 미인 서시에 비유하며 이마를 찡그리자 사람들의 애간장이 끊어진다"고 평했고, "석류는 당나라 현종의 비(妃)인 양귀비에 비유하여 그 총애가 육궁을 위태롭게 한다"고 했다. 여기서 해류의 종류는 백엽류(百葉榴), 화석류(花石榴), 홍화백록(紅花白綠)으로 분류됐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설명을 보면 꽃석류로 미뤄 짐작된다. ◆중국 석류는 '기승전양귀비' 중국에서 석류와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는 대부분 '기승전양귀비'로 이어진다. 당나라 현종이 어느 날 신하를 초청해 잔치를 열고 애첩인 양귀비에게 춤을 추어 흥을 돋우라고 했다. 양귀비는 신하들이 예를 다하지 않으니 춤을 추고 싶지 않다고 현종에게 속삭였다. 자신이 총애하는 양귀비가 굴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현종이 신하들에게 앞으로 양귀비를 보면 무릎을 꿇고 예를 다하라고 명했다. 이후 신하들이 양귀비가 입은 붉은색 석류 치마만 보면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대표작 「비파행」에 나오는 '붉은 치마 입은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 술잔을 엎었다'(血色羅裙飜酒汚·혈색나군번주오)는 구절을 각색한 이야기다. 또 석류가 익을 무렵 양귀비가 아예 석류나무 숲에서 살다시피 하자 당 현종은 그녀를 위해 화청궁에 석류 숲을 만들었다. 석류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함께 꽃구경을 했고, 술 취한 양귀비가 미간을 찌푸리면 술 깨라며 현종은 직접 석류를 까서 빨간 알갱이를 그녀의 입속에 넣어주었다고 전한다. 나무라면 흙에 안착해야 무성할 수 있기에 (例憑土肉得繁枝·예빙토륙득번지) 온갖 꽃들의 한들거리는 모양 보기도 지겨운데 (厭見群紅婀娜姿·염견군홍아나자) 여러 꽃 중 오직 안석류에 의지하여 (賴爾花中獨安石·뇌이화중독안석) 나와 같은 철심장도 오히려 미간을 펴게 되네 (鐵腸如我尙開眉·철장여아상개미)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석류화」(石榴花)라는 시에서 철심장을 가진 사람도 석류꽃 앞에서는 미소를 짓게 된다고 칭송했다. ◆클레오파트라, 페르세포네의 공통점 석류는 꽃을 즐기는 원예식물인 동시에 먹는 과일을 얻는 과수(果樹)이다. 가을에 껍질이 툭 터진 석류 씨알들을 입에 가득 넣고 깨물 때 퍼지는 새콤달콤한 맛은 쉽게 잊을 수 없다. 중국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유럽이나 이집트로 건너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 벽화에 석류 그림이 새겨져 있다. 한때 '미녀는 석류를 좋아한다'는 광고가 국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녀는 진짜 석류를 좋아할까? 석류를 먹으면 정말 예뻐질까? 한 번쯤 가질 만한 의구심이다. 요즘 유행하는 '팩트 체크'를 해보면 일단 미녀가 석류를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일 수 있다. 역사상 석류를 좋아했던 경국지색의 미인으로 동양엔 양귀비, 서양엔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신화에서는 페르세포네 여신을 꼽을 수 있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석류를 매우 좋아해 매일 석류즙을 마셨고 석류 씨앗으로는 립스틱을 만들어 발랐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콧대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파스칼의 말뜻은 미모(콧대)에 방점을 두는 게 아니라 인간의 헛됨이나 무모한 욕망을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기원전 1세기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를 유혹한 클레오파트라의 미모 유지 비결이 석류라는 이야기에 더 관심과 흥미를 가진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의 여신 페르세포네 이야기에도 석류는 빠지지 않는다. 제우스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는 꽃밭을 거닐다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 세계로 끌려갔다. 어머니의 강력한 요구로 딸은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지만, 하데스가 건넨 석류 3개를 먹는 바람에 지하 세계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1년 중 석 달은 땅 밑 세계에서 하데스의 아내로 지내게 된다. 신화 속 석류에는 치명적인 유혹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종교에 투영된 석류 석류는 신화와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종교 경전에도 나온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석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서 자라는 과일이다. 특히 구약성경 「탈출기」 28장에는 최초의 사제가 된 모세의 형 아론이 입을 사제복 겉옷에 석류 장식을 만들어 달도록 했다. 불교에서 아기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귀자모신(鬼子母神) 이야기에도 석류가 등장한다.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사는 마귀 야차는 아름답고 관능적인 외모로 남자를 유혹해 잡아먹는다. 가장 유명한 야차인 귀자모신은 사랑하는 자식이 1천 명이나 있었다. 제 자식은 끔찍이 아끼면서 사람의 자녀를 보기만 하면 잡아먹는 만행을 저질렀다. 엄마들이 석가모니에게 귀자모신의 못된 버릇을 고쳐줄 것을 간청하자 석가모니는 마귀의 막내 빈가라(嬪伽羅)를 숨겨 버렸다. 자식을 잃어버린 슬픔이 무엇인지 그제야 알게 된 마귀가 참회하자 석가모니는 아이 대신 석류를 먹게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귀자모신은 불교에 귀의한 뒤 해산(解産)과 육아를 맡아보는 신이 됐다. 석류는 감귤의 한 종류인 불수감(佛手柑), 복숭아와 함께 3개의 보물, 즉 삼보(三寶) 과일이다. 인간이 간절하게 염원하는 다복(多福), 장수(長壽), 다산(多産)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열매 속에 수많은 씨앗을 품고 있어 다산을 몸소 보여주고 있으니, 사람들이 자손 번성의 상징처럼 여기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불교 관련 문양에 석류가 들어가는 이유다. ◆다산의 상징 붉은색이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온 민간신앙에서는 석류도 재액(災厄)을 막아주는 과일로 취급했다. 빨간 꽃에 붉게 익는 열매, 수많은 씨알들도 모두 홍색을 띠는 석류나무 한 그루를 장독대 옆에 심으면 나쁜 기운이 범접을 못 해 장맛이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석류나무 열매가 익어 가는 과정을 아이가 어른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음낭의 변화와 모양이 닮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석류가 가진 다산의 의미에 음양의 상징성이 더해져 옛 여인들의 물품에 쓰였다. 조선시대 귀부인들의 예복인 당의(唐衣), 왕비의 대례복, 골무, 안방 가구 등에 석류 문양이 들어갔다. 비녀 머리에 석류꽃 모양을 새긴 석류잠(石榴簪), 귀부인들이 차고 다니던 석류 모양의 향낭 등에도 부귀와 공명과 다산의 뜻을 담았다. 중국에서는 이미 5, 6세기 무렵에 자손 번영의 상징으로 왕족의 결혼식에 석류 열매를 바쳤다. 튀르키예에서는 갓 결혼한 신부가 익은 석류를 땅에 던져서 쏟아지는 씨의 수만큼 자식을 낳는다고 믿는 풍속도 있다. 시골 안마당, 장독대 옆, 뜰에는 석류나무에 붉은 꽃이 활짝 피고 푸른 석류가 알알이 영글어 가지만 아이 소리는 오래전에 끊겼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도 1 이하로 떨어졌으니 지방 소멸을 대비해야 할 판이다. 석류꽃을 보면서 느끼는 감회다. 선임기자 chunghaman@imaeil.com

    2023-07-07 16:30:00

  •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옛날 토종 과일의 맏물, 앵두나무

    [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옛날 토종 과일의 맏물, 앵두나무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앵두 따다 실에 꿰어 목에다 걸고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 윤석중이 노랫말을 짓고 홍난파가 작곡한 동요 「달맞이」의 1절이다. 그해 처음 수확한 과일인 '앵두'를 따다 실에 꿰어 목걸이처럼 걸고 달맞이 가는 배고프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앵두는 작지만 생김새가 복숭아와 닮았다.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새가 복숭아를 닮았다'는 뜻의 '앵도'(鶯桃)에서 이름이 비롯됐다가 앵도(櫻桃)가 됐다. 국어사전에는 앵두나무로 나오지만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앵도나무'로 나온다. 대구수목원의 앵두나무 이름표에도 '앵도나무'이고 포털사이트의 일부에도 '앵도(櫻桃)나무'로 나온다. ◆토종 과일 중 가장 먼저 익는 앵두 비닐하우스 농사가 대세인 요즘엔 한겨울에도 딸기나 참외, 수박을 맛볼 수 있지만 옛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과일은 한정돼 있었다. 자연에 의존하는 재배 방법에다 저장하는 기술마저 발달하지 못해 여름에 수확하는 과일은 제철에만 맛을 보았다. 여러 가지 토종 과일 중 가장 먼저 익는 앵두는 단오가 되면 햇과일로 나온다. 새콤새콤한 맛은 입안을 개운하게 만든다. 열매의 크기에 비해 씨가 굵고 과육이 적은 탓에 오늘날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못 받지만 옛날에는 임금의 혼백을 모시는 제사상에 올릴 정도로 귀한 과일로 취급됐다. 조선 왕실에서 계절에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곡식을 조상의 혼에게 올리는 의식을 천신(薦新)이라고 하는데 '세종실록' 오례나 '종묘의궤'에 앵두는 5월에 살구와 더불어 변(籩)이라는 제기에 담아 올렸다고 한다.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문종이 아버지 세종에 대한 효성을 다룬 일화에 앵두나무가 언급됐다. 세종은 육식을 좋아하고 활동을 싫어해 젊을 적부터 당뇨를 앓았다. 그런 세종이 앵두를 즐기므로 문종은 세자 시절 일찍이 후원에 손수 앵두나무를 심어 앵두가 익으면 따다가 바쳤다. 세종이 맛보고는 "외부에서 바친 것이 어찌 세자의 손수 심은 것과 같겠느냐"고 하였다. 그런 영향인가, 지금도 궁궐 안에서 앵두나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은 집 정원에 앵두나무를 한두 그루씩 심어두고 꽃과 열매를 완상했다. 앵두나무는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 중국 화북 지방과 만주가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예부터 정원이나 집 주위에 관상용으로 심은 토종 과수다. 키가 크지 않고 땅에서 잔가지가 많이 나오는데 포기를 나눠 심어도 뿌리를 잘 내린다. 벚꽃이 질 무렵 3월 말에서 4월 초에 하얗고 작은 꽃이 가지에 소복하게 핀다. 열매 크기는 콩 만하며 6월 단오 무렵 겉이 빨갛고 반들반들하게 익는다.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시문선집(詩文選集)인 『동문선』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앵두를 보내준 임금께 올리는 감사의 글 「사앵도장」(謝櫻桃狀)이 실려 있다. '엎드려 생각건대 삼춘(三春)의 아래서 비로소 여러 꽃다운 물건과 함께 지내고, 온갖 과일 가운데서 홀로 먼저 성숙됨을 자랑하며, 선로(仙露)가 점철(點綴)되어 진실로 봉새가 먹을 만하거니와 덕풍(德風)을 입었음에 어찌 꾀꼬리에게도 먹게 하오리까. 마침내 높은 가지에서 따내서, 그 아름다운 열매를 나누는데, 뜻밖에 말품(末品)을 받은 것도 역시 깊은 은혜를 입혀 주신 것이므로 받듦에 빛은 초평(楚萍)을 무색하게 하고, 입에 넣음에 맛은 소귤(蘇橘)보다 나으니, 어찌 반드시 적영(赤瑛·붉은 옥돌)의 소반 위에 쌓아 높을 뿐이겠습니까.' 늦어도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앵두가 들어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귀한 과일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고려 후기 문호 이규보(李奎報)의 시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이나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시문집 『포은집』에도 앵두나무가 등장한다. ◆미인의 비유 '앵두 같은 입술' '단순호치'(丹脣皓齒)라는 말은 옛사람들이 내건 미인의 조건이다. '붉은 입술에 하얀 치아'를 꼽았다. 잘 익은 앵두의 빨간 빛깔은 관능적 매력을 느끼게 해서 앵순(櫻脣), 즉 '앵두 같은 입술'이라는 표현은 대중가요나 시에 자주 나오는 말이다. 1978년 가수 최헌이 부른 가요 「앵두」의 후렴은 풋사랑의 아쉬움이 묻어난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 흘러가는 구름은 아니겠지요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눈동자 구름 속의 태양은 아니겠지요 사랑한단 그 말 너무 정다워 영원히 잊지를 못해 철없이 믿어버린 당신의 그 입술 떨어지는 앵두는 아니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 영화 「빨간 앵두」 시리즈는 선정성 때문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고, 이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되레 자극했다. 딸을 가진 여염집에선 앵두나무를 집 안에 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앵두꽃이 하얗게 피고 빨갛게 앵두가 익으면 처녀 마음은 싱숭생숭해져 바람나기 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에 동네 우물가에 앵두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동네 우물가는 처녀들이 모여 물을 긷고 빨래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자리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앵두 같은 아가씨들이 모여 앵두 같은 입술'로 입방아를 찧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1950년대 후반 KBS 전속 가수 김정애의 최대 히트곡 「앵두나무 처녀」의 1절 가사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먹고살기 힘든 농촌에서 산들산들 봄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아가씨들이 춘정(春情)과 미지에 대한 동경으로 마을을 떠나는 시대상이 가사에 담겼다. 반면 앵두나무는 형제간의 우애를 상징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다. 앵두나무의 열매가 다닥다닥 붙어서 열리는 것에서 유래한 착상이다. ◆산에 자라는 형제 이스라지 우리나라의 야산에 가면 이스라지가 자란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산에 소를 몰고 가서 풀을 뜯어 먹게 했다. 그때 산에서 잘 익은 빨간 이스라지 열매를 따먹은 적이 있다. 약간 시큼하면서 떫은 맛도 난다. 앵두와 열매 모양이 거의 같다. 조선 숙종 때 홍만선(洪萬選)이 지은 농업서인 『산림경제』(山林經濟) 제2권 「종수」(種樹)에 '앵두는 자주 옮겨 다니기를 좋아하므로 이스랏(移徙樂)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 명의 허준이 저술한 의학서 『동의보감』에도 앵두를 이스랏이라 했고, 지금 이스라지[郁李]라고 부르는 작은 나무는 멧이스랏이라고 했다. 앵두와 이스라지의 열매가 거의 비슷하므로 옛날에는 자라는 곳만 다를 뿐 같은 나무로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양앵두가 많이 재배된다. 양앵두나무는 키가 거의 10m에 이르는 큰 나무다. 이름은 양앵두지만 나무나 열매 모양은 버찌에 가깝고 굵기는 몇 곱절이다. 새콤달콤한 앵두는 약주를 담그면 새빨갛게 우러나와 색이 보기에 곱다. 앵두주는 피로회복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는 앵두편(䭏·떡)을 만드는 방법이 나온다. '앵두를 끓는 물에 반쯤 익혀서 씨를 발라내고 잠깐 데친 후 체로 거른 뒤에 꿀과 졸여 섞고 엉기면 베어 쓴다'라고 했다. ◆'먹튀'의 순우리말 '앵두장수' 순우리말에 '앵두장수'가 있다. '앵두를 파는 사람'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에는 '잘못을 저지르고 어디론지 자취를 감춘 사람을 이르는 말'로 풀이했다. 요즘 말로 사기 행각이나 돈을 떼먹고 줄행랑을 놓는 '먹튀'다. 임금이 한겨울에 앵두를 갑작스럽게 찾았다. 다급한 관리는 '앵두를 구해 오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고 방을 붙였다. 때마침 한 장사꾼이 상에 눈이 멀어서 술로 담가 뒀던 앵두를 꺼내 물에 깨끗이 씻어 새것인 양 진상을 했고 큰 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장사꾼은 상을 받은 즉시 술 먹은 앵두라 들킬 것을 알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쳤다고 한다. 국회 활동보다 비트코인 투자에 진심이었던 젊은 정치인이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 대신 장기간 잠수 탄 뒤 국회에 슬그머니 나타난 모습을 보니 씁쓸하게도 '앵두장수'를 떠올리게 된다. 선임기자 chunghaman@imaeil.com

    2023-06-09 1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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