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물(勿), 이를 위(謂), 어미 모(母), 허물 과(過)로, 어머니(계모)의 과실(過失)을 듣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중봉집(重峰集)'에 전한다.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때 조헌(趙憲1544~1592)은 성리학자로 '해동18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호는 중봉(重峰)이며, 경기도 김포(金浦)출신이다. 조헌이 다섯 살 때 정자에서 천자문(千字文)을 읽고 있는데, 벼슬아치들이 떠들썩하자 아이들이 모두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데 조헌만이 홀로 남아 책을 읽고 있어 훈장이 기특하여 그 까닭을 물었다.
"책을 읽을 때는 오로지 마음을 모아 책을 읽는 데만 집중하라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조헌은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가난하여 추운겨울 옷과 신발이 다 헤졌는데도 먼 글방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또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땔감을 해와 부모 방에 불을 때고 그 틈에 책을 읽었다. 심지가 굳은 조헌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의붓어머니와 살았다. 한 번은 외갓집에 가서 외할머니를 뵈었는데 외할머니께서 등을 쓰다듬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어린 네가 계모의 학대를 받는다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구나!"
조헌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외가에 가는 발길을 끊었다. 그 후 오랜만에 외가에 가니 외할머니께서 물으셨다.
"그동안 어찌하여 오지 않았느냐?"
"외할머니께서 의붓어머니의 잘못을 말씀하시니 차마 듣기 거북하여 그랬습니다."
그 후 외할머니는 다시는 계모의 과오를 말씀하지 않으셨다.
조헌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1567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 1568년 홍주목의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 세웠다. 1572년 교서관 박사 때 국시에 반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을 반대, 소(疏)를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1574년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시무 팔 조서'를 올린 뒤, 1582년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외직을 자청했고, 보은현감일 때 충청좌도에서 으뜸이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을 칠 길을 빌리는 가도공명(假途攻明)을 청해오자 옥천에서 상경, 대궐문 앞에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3일 동안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자 옥천에서 의병 1천700명을 규합하고,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의병장으로 청주성을 수복했다. 금산으로 향하는 왜적을 맞아 8월 18일 아들 완기(完基)와 승병장 영규 등 의병 700명이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피신을 권하자 '이곳이 내가 순절할 땅이다'며 장렬히 전사했다.
중봉은 방대한 독서편력으로 애국위민의 실학사상을 지향한 유학자였으며, 이이(李珥)의 고제(高弟)로 조선후기의 실학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북학파실학자인 박제가(朴齊家)도 중봉의 애국위민의 사상을 본받았으며, 국란이 일 때마다 '물위모과'의 충정이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 든든하고 굳센 확호불발(確乎不拔)의 맥을 이어 병자호란 때의 김상헌이나 송시열, 한말의 최익현 등이 중봉을 숭상했다.
1734년 영의정에 추중되었으며 옥천에 표충사를 지어 기렸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헌으로 '중봉집(重峰集)'과 '중봉동환봉사(重峰東還封事)'가 있다.
(사)효창원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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