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아주 오래전, 어떤 곤궁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좀처럼 카운터에 앉지 않았고 손님이 들이치지 않기를, 되도록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너무도 적중한 탓에 정말 누구도 들이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만 이어졌다.
그런 시국에도 신간도서는 들어왔기에 출입구에 둘지 계산대에 둘지, 책을 세워 놓을지 눕혀 놓을지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기도 했다. 허나 출입구도 계산대도 손님 구경은 힘들었고 서점이라는 이 점포가 도대체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조차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누가 듣는다고 노래는 매일 바꿔 틀면서도 생활을 바꿔 틀 생각은 아무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음악은 나오되 리듬은 흐르지 않는 날들이 반복됐다. 이럴 때가 아니지, 뭐라도 해야지 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번엔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찾아와 괴롭혔다.
찾아오는 이가 또 있기는 했다. 어쩌다 가게 문 여는 손님을 놀라 쳐다보면 아는 사람이 지나가다 들른 경우였고 인사로 건네는 "좀 어떠냐"는 말에는 "그렇죠, 뭐"밖엔 할 말도 없었다. 그런 식의 대화는 늘 일찍 끊겨 함께 말없이 가게 문이나 쳐다보는 것이 다음 순서였다.
책 한 권의 무게와 벽돌 한 장의 무게가 희한하게 닮았음을 그 시절 알게 되었으나 둘을 바꾸어 쌓아도 무방함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혹시 이 모든 이야기도 책에 나오지 않을까 하여 이 책 저 책 뒤적이다 보면 또 허기가 졌다.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가는 속도를 헤아리다 보면 어느덧 밥때가 되었고 그러면 또 하루는 금세 접혀 들어갔다. 저녁은 빚쟁이처럼 매일 함부로 찾아왔고 그렇게 서지도 걷지도 못한 자세로 긴 그림자만 밟아댔다.
책장의 먼지나 닦는 동안 다 지나갈 계절이었지만 꽃도 피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져버릴 것 같았다. 뚝, 뚝 떨어지는 것이 나뭇잎만은 아니어서 가급적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손님보다 일하는 사람이 많은 가게가 다 그렇듯 고양이마저 딱하게 쳐다보다 고개 돌리곤 했다. 시답잖은 말은 왜 해도 해도 끝이 없는지 바람 빠진 농담이나 실실 하다 보면 마감 시간이 됐고, 우리는 아무도 열려고 애쓰지 않는 문을 굳이 잠그고 나갔다. 내일 이 문을 왜 또 열어야 하는지가 의문이었지만 누구도 묻지 않았기에, 그래서 언제나 내일은 왔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 어떤 곤궁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이나 지금 그 시절이 끝났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곤궁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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