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겨울이 오면, 얼음이 얼면

권기철 화가
권기철 화가

전화가 왔다.

"아우야, 대구 촬영이다. 누드모델 20명이 필요한데, 네가 구해줘야겠다."

"헐, 형! 누드모델? 내가 20명을 우째 구하노, 19명이면 몰라도 히히히."

농담을 섞어 통화를 했다. 2004년 여름이다. 사진작가 김아타였다. 레이어를 수천 장씩 겹쳐 사진을 말간 우윳빛으로 만들어 버리는 뛰어난 아티스트다. 그때 그는 '온 에이 프로젝트' 작업을 하며 많은 사람을 누드 촬영하고 있었다. 일종의 DNA의 근원을 찾는 방대한 작업 중에 하나였다. 우여곡절 끝에 나를 포함한 학생들의 참여로 모델 작업은 이루어졌다.

모델 작업과는 다소 온도차가 있지만 김아타 '개념미술'에 혹하는 사례가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순전히 '개념미술'에 대한 내 자의적인 해석이다. 수업할 때 가끔 예를 들어 설명하면 학생들도 좋아한다.

전시장에는 물이 가득 차 있는, 투명하고 똑같은 크기의 유리컵이 한 줄로 진열돼 있다. 정확한 간격을 유지한 채 한 치의 변화도 없는 긴장감을 촉발하는 설치다. 컵의 수는 108개다. 첫 번째 컵 앞에는 '마오쩌둥 초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중간쯤을 지나자 제목은 '마릴린 먼로 초상'으로 돼 있다. 마지막 컵에는 '마오쩌둥, 마릴린 먼로 섹스하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컵에 물을 달랑 채워 놓고 누구의 초상이니 뭐니 하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당혹스러운 걸 넘어 몹시 궁금해진다. 보충 설명에 허기가 지고 의문들이 무럭무럭 올라온다. 도슨트를 찾거나 친절한 설명의 텍스트를 읽고 싶어한다.

'마오쩌둥 초상'이란 제목의 컵에 담긴 물은 마오의 두상을 일대일 얼음조각으로 만들어 녹인 물이다. '마릴린 먼로 초상' 또한 먼로의 얼음 초상 조각을 녹인 물이다. 둘을 섞어 놓은 물이 '마오쩌둥, 마릴린 먼로 섹스하다'이다. 재치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108개 컵의 의미는 백팔번뇌와 무관치 않다. 마오와 먼로는 동시대를 먼 공간에서 살긴 했지만 극히 다른 캐릭터다.

이런 형식의 전시는 다분히 개념적이고 치밀하다. 과정을 소급하면 더 흥미롭다. 이 시대 얼음조각의 최고 장인을 섭외하고, 마오와 먼로의 두상을 일대일 크기로 얼음조각을 한다. 완성하는 시점부터 얼음조각 앞에 카메라가 설치되고 영상이 재생되며 시간이 흐른다. 얼음은 시간이 개입되면서 자연스럽게 녹아 물이 된다. 그 물을 받는다. 그 물 또한 시간의 세례에 아주 서서히 기화된다. 이를테면 고체가 액체가 되고 그 액체는 곧 없어진다.

말하자면, 보이던 것이 없어진다. 시간이라는 힘은 가히 파괴적이라 인공물을 탈색시키며 서서히 부식시킨다. 그래서 작가가 말하는 '세상에 모든 존재는 사라진다'는 함수관계는 설득력 있게 콕콕 꽂혀온다.

기화되어 우리의 눈에서 사라진 물은 대기를 떠돌다 눈과 비가 되어 다시 내린다. 자연의 평범한 순환 같지만, 얼음조각의 두상이 서서히 녹아 목이 가장 먼저 댕강 떨어지는 순간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묘사하기 힘든 자연 속의 작은 인간을 만나게 된다. 참으로 서늘하다. 17년 전 얘기다. 밀양의 배내골, 꽁꽁 언 겨울 얼음 위에서 김아타 형과 프로젝트를 동행하며 들었던 얘기들이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