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5시에 도착하니 앞에 40~50명이 있었습니다. 맨 앞줄은 텐트까지 치고 작정하고 온 것 같습니다. 결국 오후에 입장해서 원하는 물품이 없어 그냥 나왔습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이 이달 14일 일부 핸드백 제품 가격을 10~17% 기습 인상한다는 소식이 들려 지난 12일 신세계백화점 대구점 샤넬 매장 앞에서 '오픈런(매장 열기 전부터 대기하다 뛰어가는 것)' 했다는 한 방문객의 말이다.
샤넬은 코코핸들 스몰 사이즈를 10.5%(560만원→619만원), 미디움 사이즈를 11%(610만원→677만원) 각각 올렸다. 비즈니스 어피니티 스몰 사이즈는 16.6%(494만원→576만원) 올렸고 미디움 사이즈는 16%(522만원→605만원) 인상했다. 샤넬은 작년 2월·7월·9월·11월 등 이미 네 차례나 가격을 올렸다.
올해도 '명품 사랑'이 이어지는 가운데 명품 업계는 신년 초부터 줄줄이 가격을 올리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명품들의 가격 인상 주기가 이전보다 더 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명품 가격이 올라도 백화점 오픈런 줄은 줄어들지 않고 더 늘어났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명품, 새해 첫날 시작으로 줄줄이 인상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는 지난 6일 가방과 지갑 등 일부 품목의 가격을 최대 7% 인상했다. 인기 제품인 린디26은 4.2%(981만원→1천23만원), 가든파티36은 3.3%(482만원→498만원), 피코탄18은 6.5%(354만원→377만원) 각각 올랐다. 프랑스 패션업체인 크리스찬 디올도 지난 18일부터 핸드백 주요 제품 가격을 8~20% 더 비싸게 팔고 있다. 디올 인기 제품인 '레이디백'은 하루밤 사이 100만원 넘게 뛰었다. 특히, 라지 사이즈는 700만원에서 840만원으로 가장 많이 올랐다. 롤렉스는 새해 첫날 주요 제품 가격을 8~16% 인상했다. 인기 모델인 '서브마리너 논데이트'가 985만원에서 1천142만원으로 16% 뛰었다. 영국 패션 업체 버버리도 25일 주요 제품 가격을 10% 올렸다.
명품 업계들은 가격 인상 이유에 대해 원자재·인건비·물류비 인상 등 이유를 내놓는다. 하지만 원가 문제가 해결돼도 한번 오른 명품 가격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소비자들이 많다. 이들이 "명품 업체가 자주, 비싸게 가격을 올려도 잘 팔리니 올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 이유다.
◆계속 올려도 "없어서 못 산다"는데…외신도 신기해하는 듯
가격이 하루 아침에 수백만원 뛰어도 "없어서 못 산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온라인 명품 커뮤니티에는 명품의 인상 소식이 들릴 때마다 "오전 5~6시에 도착했지만 대기줄이 너무 길어 못 샀다", "새벽이 아니라 전날 밤에 미리 돗자리 깔고 노숙해야 살 수 있다"는 반응이 줄을 잇고 있다. 명품 매장에 입고되는 물품의 수량에 비해 명품 수요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다.
한국의 오픈런 현상은 외신도 주목한다. "한국 명품 구매자들은 프랑스 브랜드 지갑을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이다. 대유행 속에서도 한국에서 스테이크, 화장지 등을 사재기 하는 사람들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또 다른 새로운 습관을 길렀다. 오전 5시부터 백화점 밖에서 줄을 서서 샤넬 지갑과 같은 물건들을 사는 것이다." 미국 경제매체인 블룸버그 통신이 지난달 한국인의 명품 사랑을 두고 조명한 기사의 대목이다.
코로나 시대 감염 우려로 백화점 업계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전망은 명품 수요로 사라진 지 오래다. 지난해 코로나19 여파에도 불구하고 '1조 클럽'에 가입한 백화점은 업계 최단기 기록(4년 11개월)을 세운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을 포함해 총 11개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1조 클럽 중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은 모두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가 입점해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 따르면 백화점 매출 구성의 30% 이상은 명품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픈런 현상, 왜 한국에서 일어날까
일각에선 명품의 가격 인상이 계속 이뤄지더라도 한국에서 오픈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두고 '베블런 효과'가 잘 일어나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통상 가격이 높아지면 수요는 낮아지는 게 경제학의 기본 원리이지만, 누군가에게 과시하거나 인정받기 위한 욕구에서 비롯된 명품 구매는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자존감 충족 문제와도 연결됐다. 자존감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사회분위기가 한국 명품 열풍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명품을 사면 낮은 자존감이 회복될까요", "명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나요" 등 내용의 글들을 찾아볼 수 있다. 27일 유튜브 검색창에 '자존감'을 입력하면 '자존감 높이는 법', '자존감 낮은 사람 특징', '자존감 높은 사람 특징', '자존감 낮은 남자', '자존감 낮은 여자' 등이 자동완성 검색어로 노출됐다.
지난해에는 국경 봉쇄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해 명품 구매로 눈을 돌렸던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는 분석도 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지난해 오픈런 현장의 연령대는 주로 20~30대인 MZ세대가 주를 이뤘다. 코로나 이전 명품 수요자는 보통 40~50대가 많았지만 MZ세대가 큰 손으로 떠오른 것"이라며 "보통 취업 전, 혹은 연휴 때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데 2020년 이후에는 이게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여행 목돈을 오래두고 쟁여놓을 수 있는 명품가방 지출에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구매 뒤 가격을 올려 되파는 '리셀러'가 판치는 것도 시장을 과열되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희소성으로 비싸게 팔더라도 구매자가 있다 보니 투자의 관점으로 구매를 하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지난 14일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이 17만9천원에 판매한 한정판 나이키 골프화 '에어 조던 1 로우 G'를 사기 위해 몰려든 이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것도 일단 구매만 하면 되팔기로 큰 수익률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27일 한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이 신발 가격이 정가의 3배 이상 뛴 60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열성적인 오픈런을 해야 제품을 구할 수 있는 탓에 일부 소비자들은 온라인 중고시장을 통해 구매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기 품목의 경우 이곳에서조차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게 커뮤니티 회원들의 얘기다. 샤넬은 지난해 10월부터 웃돈을 얹어 팔기 좋은 일부 인기 제품 가방을 1년에 한 번씩만 구매할 수 있게 했지만, 대리구매 아르바이트 등의 성행으로 일일이 막아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게 전반적인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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