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謝過)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뜻이다. "사과하세요!"라는 요구에 "그래요. 사과합니다. 됐습니까?"라고 응수한다면 질문도 대답도 틀렸다. 사과는 요구하는 게 아니다. 방영 중인 한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옛날에 사과는 참 멋진 행동이었다. 한 인간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용기 있게 하는 행동이 사과였다. 언제부터인가 사과가 강요에 의한 비굴한 행동이 됐다. 더 이상 용기 있게 사과하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감동을 느끼기 힘들어졌다.'
이른바 '촛불 민심'을 등에 업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치는 어느 정권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도 예고편이 화려한 작품치고 흥행 대작이 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문 정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발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열거하기도 번거로운 오만과 독선의 사례들로 국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고, 조국 사태에 이르러 실망과 배신감이 극에 달했다. 민심은 싸늘히 식었고 2020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여당 참패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지금은 말조차 꺼내기 민망스러운 'K-방역'의 유령으로 국민들을 미혹했다. 코로나19 공포가 세계를 휩쓸던 당시 우리나라만 마치 코로나를 물리친 듯한 쇼를 보여줬으니 어찌 국민들이 혹하지 않겠는가.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지기까지 거대 여당은 우월한 힘을 과시하며,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혁 입법'에 박차를 가했다. 부단한 개혁의 화룡점정은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로 귀결되고 있다.
다시 사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조국 자녀 입시 비리에 대해 법원이 동양대 표창장, 6개 인턴 활동 확인서를 허위라고 판결한 만큼 조국 전 장관이나 정경심 교수는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발언의 배경은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와 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면서다. 인사청문회를 앞둔 장관 후보자들의 의혹을 열거하는 것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 발언이 못내 걸린다. 박 위원장은 조국 전 장관 자녀 입시 비리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절대적으로 공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에 조국 전 장관은 "교수 부모가 제공한 인턴·체험 활동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분들께 송구하다"고 했다. 사과의 범위는 입시 비리가 아닌 인턴·체험 활동 기회 유무 차이가 됐다. 여러 차례 사과했고, 앞으로 몇백 번이고 사과하겠다면서 "저희 가족 사건에 대한 수사, 기소, 판결의 잣대에 따라 윤석열 정부 고위공직자를 검증해 주길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 사과를 요구하고, 당사자는 수백 번이라도 사과하겠다고 한다. 단 조건이 달려 있다. 거듭 말하지만 단서가 붙은 사과는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 새 정부 인사청문회를 앞둔 시점에서 오갈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게다가 민주당 인사들은 더 이상 사과를 요구하지 말라고 자기 사람에게조차 일갈한다. 할 만큼 했다는 의미다.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조차 판결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사과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 수 있을까. 이는 민주당이나 조국 전 장관만의 문제가 아니며, 보수와 진보의 다름도 아니다. 분위기에 편승한 억지 사과가 아니라 진정한 사과에 감동하며 고개를 끄덕거린 기억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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