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가창의 채병표(1927년생) 씨는 1950년 7월 경찰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10여 명이 함께 새끼줄에 묶여 가창골로 갔다. 채 씨의 아내는 당시 딸을 갓 낳은 상태로 남편을 찾아 나섰다. 출산 직후여서 피가 계속 나와 냇가에서 씻으면서 현장에 갔지만,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경북 청도의 한용수(1921년생) 씨도 비슷한 시기에 경찰서로 연행됐다. 승학골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20㎞를 걸어 도착하니 수십 구의 시체가 있었다. 주위에 벌레가 들끓었고, 얼굴은 총을 맞아 알아볼 수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을 단서로 남편을 찾았다. 주머니에는 면회 때 사줬던 담배가 뜯기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지난 1946~1950년 사이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참상이다. 매일신문 취재팀은 24명의 증언자를 일일이 찾아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유족들은 먼 기억을 되살려, 슬픔과 분노가 담긴 사연을 털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24일까지 다섯 편에 걸쳐 '대구 시월, 봉인된 역사를 풀다'를 보도했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뿐만 아니라 이후 자행된 '빨갱이 사냥'의 희생자들을 재조명했다. 해방과 정부 수립, 한국전쟁에 이르는 일련의 역사 흐름 속에서 발생한 억울한 죽음들을 세상에 알렸다.
하지만 아직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남은 가족의 처참한 삶을 모두 전하지 못했다. 10월 항쟁에 참여한 아버지 대신 끌려간 어머니를 잊지 못한 한 딸은, 괴로움과 그리움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병원의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고 싶은 어머니를 떠올리며 쓴 시를 남겼다.
또 아들의 실종에 한 어머니는 점점 정신이 이상해졌다. 자다가 일어나 갑자기 헛소리를 하거나, 동네에서 소리 지르며 아들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취재 과정에서 지역 한 대기업 대표의 가족도 만났다. 대표의 외삼촌이 민간인 희생자였다. 대표의 어머니는 90세가 넘는 고령의 몸으로 2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참여해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오빠가 형무소로 끌려간 뒤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증언했다. 이 가족은 더는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억눌린 분위기 탓에 피해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길 꺼렸다.
민간인 학살에 대해, 우리 지역에는 '침묵의 카르텔(Cartel)'이 형성돼 있다. 그 바탕에는 '빨갱이'라고 일컫는 적대적 혐오가 있다. 특정 이념에 대한 멸시는 '정치적 풍토병'이 됐다. 이러한 침묵과 혐오, 멸시는 우리 안의 반휴머니즘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것이 진실과 화해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민간인 학살의 아픔을 경험한 제주와 여수·순천은 다르다. 제주 4·3은 이미 2000년부터 특별법이 시행돼 진상 규명은 물론이고, 지난해 12월 가결된 개정안을 통해 구체적인 보상 규정까지 마련했다. 여수·순천 사건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올해 1월부터 시행됐고, 이달 19일 처음으로 정부가 주최한 추념식도 열렸다.
대구 10월 항쟁과 민간인 학살의 역사는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과거다. 이는 지역사회의 직무유기다. 인간의 존엄성과 타인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이자, 이념의 폭력과 전쟁의 광기에 대한 방기다. 지금이라도 나서지 않는다면, 항쟁과 학살은 영영 잃어 버린 역사가 될 것이다. 망각은 역사의 법정에서 결코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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