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막되었다. 이 회의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하여 세계 열강 국에 한국 독립과 주권 회복을 호소하다 강제 하야 당했다고 알려졌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뿌리는 1905년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약에 의하면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만 행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통감부가 설치되어 내정까지 장악하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고종은 황제 전제권을 이용하여 국가 재산을 착복했고, 황실이 직접 세금을 걷어 개인적으로 전용하는 등 가산제(家産制) 국가로 만들어버렸다. 통감부가 출범하자 고종은 불법적으로 만끽해 온 기득권 보호를 위해 황실 예산에 대해서는 통감부가 손대지 말라는 요구각서를 제출했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종의 요구를 무시하고 궁중 개혁을 단행하여 고종이 국고에 손을 못 대도록 봉쇄했다. 분노한 고종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폭로하려고 극비리에 러시아와 접촉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고종과 거리를 두었다.
이 무렵 러시아 강경파들은 일본에 복수하고자 제2차 러일전쟁을 선동했다. 하지만, 공산혁명 분자들의 폭동‧시위가 빈발하자 일본과의 화해가 급선무였다. 일본도 포츠머스강화조약으로 얻은 특권과 이익을 지키고자 러시아와 협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 만주 이권과 대한제국 보호권을 놓고 갈등을 거듭했던 러일 양국은 1907년 3월부터 비밀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전쟁 배상금과 대한제국 병합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러시아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일본이 대한제국 주권을 변경할 경우 대한제국 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관계 열강인 러시아와 합의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비밀협상의 핵심 쟁점은 대한제국 병합 문제였다. 일본이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러시아는 고종과 대한제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한 방 먹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비밀작전을 추진했다. 고종을 설득하여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밀사를 파견시킨다. 이들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저지르는 내정간섭 실상을 만천하에 폭로한다는 계획이었다.
러시아는 거리 두기로 일관하던 입장을 바꿔 고종과 접촉, 밀사 파견 의사를 타진했다. 고종은 이 기회에 일본의 내정간섭 실상을 폭로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되찾기로 한다. 고종은 서울의 프랑스어 학교 교사 마르텔(Emile Martel)을 베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에게 보내 "헤이그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달라"는 친서를 보냈다.
러시아 정부는 "대한제국의 입장을 국제회의에서 밝힐 수 있도록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한다"라고 답신했다. 그 즉시 헤이그 평화회의 러시아 대표위원 넬리도프(A. Nelidov)에게 "대한제국 대표단의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해 모든 협조를 하라"는 훈령을 보냈다.
고종은 니콜라이 2세의 선의만 믿고 밀사를 파견했다. 다시 말하면 헤이그 밀사 파견은 고종의 결단이 아니라,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보호'에 타격을 주려고 일부러 특사 파견을 유도한 것이다(석화정, 「한국 '보호' 문제를 둘러싼 러·일의 대립」, 정성화 외,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6, 79~86쪽).
밀사 일행이 헤이그에 도착한 날은 회담이 개막된 지 열흘 후인 6월 25일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 곳곳에 침투시킨 밀정을 통해 고종의 밀사 파견 사실을 상세히 파악하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교착상태에 빠져 결렬 위기를 맞았던 러일 비밀협상은 헤이그에서 평화회의가 개막되면서 급속히 타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대한제국 특사의 헤이그 도착 전날인 6월 24일, 러일 양국은 가장 중요한 쟁점에 대해 극적으로 합의했다. 그 즉시 러시아 정부는 넬리도프에게 "한국 특사의 회의장 입장을 거부하라"라는 새 훈령을 보냈다(석화정, 앞의 논문, 86~88쪽).

사정을 전혀 모르는 대한제국 밀사들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에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찾아갔다. 넬리도프는 이들의 회의 참석 요청을 거부했고, 그 즉시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특급 정보를 일본 측에 통보했다.
여기서 중대한 역사적 날조가 전개된다.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발간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이준 밀사가 회의장 입장을 거절당하자 "이준 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 호외)라고 보도했다.
이준의 사망 원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자 국사편찬위원회는 1956년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실 관계 추적에 나섰다. 그 결과 베델의 동료였던 양기탁으로부터 "내가 신채호·베델과 협의하여 이준의 죽음을 민족적 긍지로 삼아 만방에 선양할 목적으로 할복자살로 꾸며내 보도했다"라는 내용을 확인했다. 이준의 할복자살은 가짜 뉴스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 언론보도에 의하면 이준은 뺨에 난 종기 제거 수술 도중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일본의 정보 보고서에는 이준이 헤이그에서 단독병(丹毒病, 연쇄상구균에 감염되어 피하조직과 피부에 병변이 나타나는 급성 접촉성 전염 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밀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일본은 고종의 밀사 파견을 역이용하고 나섰다. 일본 내각과 원로회의는 7월 10일 이 기회에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장악하기로 하고 그 실행을 이토 통감에게 일임했다.
일본은 7월 19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7월 24일, 제3차 한일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비밀각서에 의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하여 내정권 장악, 사법권 및 경찰권을 장악했다. 제3차 한일협약이 조인된 지 6일 후인 7월 30일, 러일 양국 대표는 제1차 러일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서 러시아는 일본과 대한제국의 현재 관계를 인정하고, 이 관계가 계속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이때 비로소 일본은 대한제국 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헤이그 밀사 파견도 무위로 끝나고, 의병 봉기도 실패하자 고종은 니콜라이 2세에게 "러시아로의 정치 망명"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준수와 극동 질서를 강조하면서 고종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것이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의 진실이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